
“Back in action.” 낸시 마이어스의 〈인턴〉(2015)에서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 벤(로버트 드니로)은, 첫 출근을 준비하며 혼잣말을 한다. 휴식이나 부상으로 긴 공백을 가진 후에 다시 활동을 시작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혼잣말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함께 출근하게 된 가방에게 건네는 인사말이다. 40년 넘게 일한 출판사에서 은퇴한 일흔 살의 벤은 아내와 사별한 뒤 여행도 다니고 외국어도 배우던 중, 그처럼 패션회사 ‘어바웃 더 핏’이 모집하는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에 합격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다.
〈인턴〉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물은, 벤과 함께 다시 출근길에 오르게 된 짙은 갈색의 오래된 가죽 서류 가방이다. 영화의 포스터에도 등장하고, 따로 가방만으로 만들어진 포스터도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비라고나 할까. 함께 인턴으로 일하게 된 옆자리의 데이비스(잭 펄만)의 가방에서는 스마트폰과 충전기, USB 드라이브와 멀티 케이블 커넥터가 나오는 반면, 벤의 가죽 가방에서는 안경 케이스, 만년필 세트, 계산기, 삼성 폴더폰, 종이 신문, 작은 여행용 시계가 나온다. 그 서류 가방에 반한 동료에게 벤은 “1973년에 만들어진 애쉬번 가방(1973 Executive Ashburn Attaché)”이라며 “이제는 만들지 않아”라고 말한다. 40년 넘게 전화번호부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했고, 그중 20년 동안 영업·광고 담당 부사장이었던 그에게 그 가방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동료나 다름없다. 오래되었지만 망가지지 않은 채 오랜 세월 자신의 쓰임새를 잃지 않은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다. 벤이라는 사람 또한 그러하다.
〈신부의 아버지〉(1991), 〈왓 위민 원트〉(2000),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2003), 〈로맨티 홀리데이〉(2006), 〈사랑은 너무 복잡해〉(2009) 등 무수히 많은 작품에서 각본과 연출을 겸한, 할리우드의 대표적 ‘로코’ 장인 낸시 마이어스에게 그 가죽 가방만큼이나 소중한 벤의 소품은 손수건이다. 데이비스는 벤이 매일 깨끗하게 다린 흰색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손수건은 왜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라는 물음에 벤은 자신이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이제는 사라져 가고 있는 신사의 마지막 흔적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줄스(앤 해서웨이)의 개인 비서 베키(크리스티나 셰러)가 울음을 터뜨리자, 벤은 다른 동료를 통해 그 손수건을 전달한다. 어떤 사물은 소유의 이유보다 사용 방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벤의 의상도 중요하다. 굳이 차려입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줄스에게 벤은 “저는 수트가 편합니다”라고 말한다. 새 직장에서 잘 보이기 위해서도, 과거에 집착해서도 아니고 그저 가장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이다. 1973년에 만들어진 서류 가방이 마치 힙스터의 그것처럼 보이듯 잘 다려진 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말끔한 수트도 오히려 벤의 개성이 된다. 오랜 세월 축적된 벤의 자택 의상실은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엄청난 속도로 회사를 성장시켰지만 늘 시간에 쫓기고, 잠도 부족하며, 실수로 이메일을 잘못 보내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줄스와 달리 벤은 그처럼 늘 편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최근 리메이크된 한국영화 〈인턴〉에서는 구체적으로 그런 요소들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낸시 마이어스의 〈인턴〉에서 벤의 이 사물들을 아예 학술적으로 분석한 논문도 찾을 수 있다. 앨리슨 바틀렛은 ‘비즈니스 수트, 서류 가방, 그리고 손수건: 〈인턴〉의 복고적 남성성의 물질문화’라는 논문을 통해 낸시 마이어스가 ‘낡은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70대 노인 인턴’을 희화화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의 취향과 삶의 방식을 드러내며 단숨에 힙스터처럼 보이게 만드는지’ 분석한다. 한편으로 벤의 수트와 가방, 그리고 손수건은 과거 성공한 미국 중산층 남성 직장인을 대표하는 물건들이기도 하다. 그 시대의 회사는 훨씬 남성 중심적이었고 여성에게 닫혀 있는 공간이었다. 영화에서 회사의 새로운 CEO를 찾기 위해, 주로 남성 후보들을 만나러 다니는 줄스는 성차별적인 언행을 겪기도 하는데, 사실상 벤은 그들보다도 훨신 고령자다. 즉, 벤을 통해 단지 복고적인 매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흐름에 자연스레 합류하는 클래식의 기품을 보여준다. 낸시 마이어스의 무르익은 내공이 연출 이외의 방식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다.
벤의 가죽 서류 가방은 1960~1970년대 미국의 비즈니스맨용 가방으로, 단단한 직사각형 프레임에 황동색 잠금 장치과 짧은 가죽 손잡이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 하드 케이스 가방이다. 여기서 1973년에 만들어졌다는 대사가 중요하다. 영화 속 벤의 나이가 70세이고 작품 배경은 2015년이기에, 아마도 벤은 이 가방을 28살에 샀을 것이다. 또한 벤이 40년 넘게 출판사에서 일했다고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풋내기 때가 아니라 그 출판사에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점에 구매했을 가능성이 크다. 선물 받은 건지, 직접 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쩌면 자신의 평생 직장으로 마음먹은 뒤부터 그 출판사 시절과 오래오래 동고동락한 물건이 틀림 없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영화 제목 〈인턴〉과 ‘Executive Ashburn Attaché’라는 가방 이름 사이의 흥미로운 대비다. ‘executive’에는 ‘임원’이라는 뜻이 있다. 실제로 그 가방을 가지고 임원으로 활동했던 벤이 이제는 가장 낮은 직급인 인턴(intern)이 됐다. 인턴이 들고 다니는 임원 가방이라는 절묘한 역설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듯, 그 회사는 과거 실제로 벤이 다녔던 출판사를 리모델링한 건물이다. 달라진 회사, 아니 더 나아가 달라진 세상에서 다시 일하게 된 벤과 가방이랄까. 가방도 옛 직장에 다시 출근했다.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방식이다.
영화 속 물건들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 ‘주성철의 사물함’을 시작으로 떡상을 기대하는 배우 사용 설명서 ‘김지연의 보석함’,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음악 감상실 ‘추아영의 오르골’, 서브컬처 잡상인의 구매일지 ‘성찬얼의 만화책’까지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저마다의 취향과 시선으로 격주 연재를 시작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