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대권 도전과 세 번의 고배… ‘대쪽’ 이회창은 왜 청와대에 입성하지 못했나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대선에 세 번이나 출마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정치인이 있다. 바로 ‘대쪽’이라는 별칭과 함께 보수 진영의 거목으로 군림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다.
대법관과 국무총리를 거치며 원칙과 강직함의 상징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그가 왜 번번이 청와대 문턱에서 좌절해야 했는지, 그의 정치 역정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이 전 총재의 첫 도전이었던 1997년 제15대 대선은 보수 진영의 분열과 야권 연합이 승패를 갈랐다. 당시 여당 후보였던 그는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로 인한 보수 표 분산, 그리고 김대중-김종필 간의 이른바 ‘DJP 연합’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김대중 후보에게 불과 1.6%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다.
2002년 제16대 대선은 이른바 ‘이회창 대세론’이 정치권을 휩쓸며 당선이 유력시되던 선거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터져 나온 ‘병풍(兵風) 사건’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전직 부사관 김대업이 제기한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은 대선 국면을 뒤흔들었고, 그의 지지율은 단숨에 10%포인트 이상 급락했다. 결국 노무현 후보의 거센 돌풍 앞에 2.3%포인트 차이로 또다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그는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세 번째 출마를 감행했으나, 15.1%의 득표율로 3위에 머물며 대권 도전의 막을 내렸다.
정치권에서는 이회창의 잇따른 패배를 두고 ‘법과 원칙’, ‘합리와 안정’이라는 엘리트 관료적 가치를 앞세웠으나, 당시 급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던 유권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못했던 한계를 지적하곤 한다.
대권 도전 이후 자유선진당 창당 등을 거쳐 2012년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을 도운 뒤 정계를 완전히 떠난 이 전 총재는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은인자중하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공식 석상 등장도 극도로 자제해 왔다. 2017년 과거 핵심 참모였던 유승민 전 의원의 대선 출정식 격려 방문과 회고록 출간 간담회를 끝으로 대외 활동을 일절 중단했다. 2024년 6월, 정연욱 국민의힘 의원이 자택을 예방한 사진을 통해 환한 미소의 백발 노신사로 근황이 공개되며 오랜만에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1935년생으로 만 90세를 넘긴 이 전 총재는 정치 현안에 직접 개입하지 않은 채 원로로서의 침묵을 지키며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의 대권 도전사는 이제 한국 현대 정치사의 묵직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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