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을 때는 바쁜 일상 때문에 대화가 줄었다고 생각하지만, 은퇴 후 한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도 말문은 오히려 더 닫히곤 한다. 같은 집 안에 있으면서도 “밥 먹어라”, “약 사와라” 같은 용건을 휴대폰 문자로만 주고받는 부부가 적지 않다.
마주치면 갈등이 생길까 봐 선택한 문자가 가장 안전한 소통 창구가 되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다툼을 피하기 위해 무작정 참아내는 일만이 과연 부부 관계를 지키는 올바른 길일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
양창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욕구가 관계를 망치고 자아를 갉아먹는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갈등이 두려워 내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고 넘어가면, 마음속에는 서운함과 원망만 묵직하게 쌓이게 된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불편함을 숨기는 태도는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한다. 내가 무조건 참아서 집안의 평화를 지킨다는 생각은 착각에 가깝다.
미안함이라는 죄책감에서 탈출하기
상대방의 무례나 불편한 상황에 대해 거절할 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내 마인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미안함’이라는 감정에서 먼저 탈출해야 한다. 상대의 기분을 모두 맞춰주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배우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상황을 견뎌내야 한다는 중압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관계를 살리는 건강한 까칠함
양창순 원장은 “건강한 까칠함은 나를 지키고 관계를 살리는 가장 최소한의 무기”라고 역설한다. 이는 감정적으로 화를 내거나 무례하게 굴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은 채 단호하게 거절하는 기술이다. 내 마음의 경계를 명확히 세울 때 상대도 선을 넘지 않으며, 비로소 무미건조한 용건 교환을 넘어선 소통이 시작된다.
부부 사이라 해서 모든 순간을 온화하게 참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작정 참아내는 억울함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뜨리는 화도 관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외를 인정하더라도 내 마음을 지키는 단호한 기준을 바로 세우는 일, 그것이 서먹해진 부부 관계에서 자신을 지키며 대화를 시작하는 가장 현실적인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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