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30년의 세월 동안 단 7편. 그럼에도 감독 이창동이 한국영화에 남긴 인장은 실로 거대하다. 2026년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에서도 신작 〈가능한 사랑〉으로 ‘은사자상’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8년 만의 복귀를 화려하게 알렸다. 영화 〈가능한 사랑〉은 정리해고된 노동자 부부와 부유한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으로, 9월 23일 극장에서 선개봉한 후 11월 6일 넷플릭스로 독점 공개된다. 한국의 거장 이창동 감독과 글로벌 OTT 플랫폼 넷플릭스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가능한 사랑〉, 9월 21일 언론시사회로 만난 후기를 전해본다. 쉽지 않은 영화인 만큼, 그리고 관람할 때 다양하게 유발되는 그 감정을 최대한 건드리지 싶지 않은 만큼 몇몇 키워드로 간략하게 구성했다.
노동자
〈가능한 사랑〉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씁쓸하게 오프닝을 연다. 검은 옷을 입은 미옥(전도연), 호석(설경구), 아들 철(정섶)이 차를 타고 있다. 그 곁을 건강박수를 하며 지나가는 주민이 묻는다. “어디 좋은 데 가시나 봐요?” 호석은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며 “좋은 데?”라고 곱씹는다. 이윽고 이들이 도착한 곳은, 호석과 함께 사측의 정리해고에 파업을 했던 동료의 장례식장이다. 이렇게 〈가능한 사랑〉은 시작부터 깊숙하게 ‘해고 노동자‘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파고든다.
호석은 차마 그곳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지만, 이내 들어와 동료들을 만난다. 사실 그는 오랜 시간 심리치료 제안을 받으면서도, 그리고 치료를 받기 위해 센터에 들리고서도 끝내 발을 돌린다. 직장 ‘동생들’이랑 고기 한 번 구워 먹겠다고 정원에 대리석 테이블을 둔 그는, 파업 이후 누가 봐도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호석을 중심으로, 〈가능한 사랑〉은 이창동 감독 특유의 집요한 취재와 묘사들로 해고 노동자들의 얼굴을 곳곳에 녹인다.
카메라
과연 카메라는 진실을 담는가? 영화와 사진이란 매체가 등장한 이후 이 질문은 끊임없이 그 답변을 요구한다. 〈가능한 사랑〉에서 예지(조여정)는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그러다 우연히 미옥을 만나고, 그와 가까워지면서 그와 호석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다큐멘터리는 대체로 ‘있는 그대로를 포착하는’ 장르로 여겨지지만 저널리즘으로 작동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인터뷰나 자료 등 어느 정도 인위적인 것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가능한 사랑〉은 카메라가 포착하는 영상의 그 미묘한 지점을 거듭 드러낸다. 예지와 대화하던 미옥이 잠시 옛날 기억을 입에 올리자, 예지는 황급히 카메라로 찍고 싶다며 세팅을 하고는 다시 이야기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것은 같은 이야기지만, 얘기를 하는 미옥의 표현이나 뉘앙스는 미묘하게 다르다. 영화에서 미옥은 카메라 앞에서 종종 머쓱하게 웃곤 한다. 그 모습은 미옥이 실제로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숨기고 싶다는 방어기제처럼 보인다. 우리가 낯선 사람과 말하며 느끼는 비가시적인 긴장감과 관계성이 예지의 카메라로, 그리고 〈가능한 사랑〉의 카메라로 스크린에 그려진다. 〈가능한 사랑〉이 카메라의 진실성이나 예술과 사실의 미학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카메라라는 소재로 빚어내는 이런 순간들은 관객 각자에게 고찰의 순간을 준다.
트라우마
오프닝과 초반부만 보아도 관객들 모두 쉽게 짐작하겠리라. 〈가능한 사랑〉은 정리해고 위기와 파업 현장을 겪은 노동자의 상흔, 즉 트라우마가 녹아있다. 호석은 한평생 일한 기업에서 버려졌는데, 사실 그것만큼 그에게 큰 상처를 남긴 건 파업 현장에서의 일이다. 영화는 대사로 어렴풋이 암시했던 일을 조금씩 선명하게 끄집어내는데, 이 순간 호석은 처음으로 속내를 모두 털어놓는다. 〈가능한 사랑〉을 전면에서 이끄는 건 미옥과 예지이지만 그 저변은 호석의 트라우마가 견디고 있다. 이토록 강렬한 기억과 정서적 붕괴를 겪은 이들은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 그 물음을 〈가능한 사랑〉은 넌지시 던진다. 한편으론 이 트라우마가 드러나는 것에서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히 한다. 호석은 오랜 시간 자신을 잠식한 트라우마를 조금은 덜어지만, 만취한 채 문득 기이한 행동을 보인다. 아마도 트라우마에 빠져 들여다보지 못한 현실적 격차를 순간적으로 목도한 것이리라. 이렇게 〈가능한 사랑〉은 긴 시간의 침식이 단번에 해결되는 극적인 묘사 대신 상흔이 남겨진 채 살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절묘하게 담는다.
사랑
사랑. 두 부부의 이야기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자연스럽게 남녀 간의 사랑이 연상된다. 그러나 작중 대사로도 언급되지만, 〈가능한 사랑〉의 사랑은 반드시 그것만이 아니다. 물론 미옥과 호석, 상우와 예지 두 부부의 사랑 이야기도 나오고 은근슬쩍 미옥이 ‘만인의 연인’ 상우에게 조금씩 끌리는 듯한 모습이 나오니 역시 그 사랑이 빠지진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보다 넓은, 좀 더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사랑도 함께 아우른다. 과연 여기서의 ‘사랑’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가능한’ 것일지는 각자 영화에서 직접 만나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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