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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거’는 어째서 거짓말을 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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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거' 포스터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영화 ‘디거’ 포스터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흥행이야 이미 절반쯤 물 건너간 일이 됐지만, 그럼에도 〈디거〉는 관객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물론 개봉 전 평단 반응처럼 불호를 표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에선 (10월 7일 기준) 왓챠 평점 3.8점과 CGV 골든 에그 92%를 달성하며 특히 호평받고 있다. 그 호평의 중심엔 아마도 〈디거〉가 공개되기 전까지 꼭꼭 숨겼던 영화의 형식이 적잖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기자 역시 〈디거〉를 시사회로 먼저 만나 입이 근질근질했었으니, 정식 개봉한 지금 〈디거〉의 형식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 아래 내용은 〈디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디거〉는 “3대째 석유 재벌로 살아온 ‘디거 록웰’이 자신이 무시한 문제로 거대한 재난이 번져가자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는 내용을 골자로 진행한다. 실제로 개봉 전까지 공개된 정보는 이것이 전부였으므로, 대중은 당연하게도 이것이 영화 속 현실의 문제이며 이것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영화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디거〉는 사실 이 내용을 넘어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는데, 바로 이 〈디거〉의 내용은 곧 실제 사건이자 이를 모티브로 한 연극 ‘화석 바보들’이며 영화 속 현실은 이미 그 사건이 지난 이후의 세계란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디거 록웰이라고 믿었던 톰 크루즈는 작중 커티스란 배우이며 디거 록웰이란 실존 인물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디거〉 속 세계의 형식미는 작품이었기에 가능한 것.
〈디거〉 속 세계의 형식미는 작품이었기에 가능한 것.

그렇게 〈디거〉는 작품 속 세계가 사실은 작중 세계의 실화를 재구성한 예술작품임을, 그래서 실제 세계는 가상의 미래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재밌게도 이 가상의 미래는 현재의 우리에게 또 낯설지가 않다. 대부분이 작품이 준비 중인 극장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가끔 나오는 화상통화 방식 등을 제외하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수제작한 무대들은 오히려 친숙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극중극으로 작중 세계를 두 개로 양분한 〈디거〉는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남기면서 동시에 두 가지 질문을 남긴다. 그럼 디거 록웰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저 세계는 어떻게 살아나가게 될 것인가. 〈디거〉는 이렇게 흥미로운 형식(극중극)을 선택했으면서, 그리고 그것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구성이면서 작품 공개 전까지는 함구했다. 마케팅에 쓸 만한 셀링 포인트임에도 말이다.

버드맨과는 다르다, 버드맨과는…!

단순하게 보면, 〈디거〉의 구성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어떤 배우가 무대에 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디거〉를 연출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대표작 〈버드맨〉이 연상된다. 2015년 나온 이 영화는 한때 슈퍼히어로 캐릭터 ‘버드맨’으로 인기를 끌었던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이 명배우로 거듭나기 위해 연극에 참여하며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았다. 무대에서의 이야기와 배우 개인의 상황이 교차되며 펼쳐지는 이야기 구조는 〈버드맨〉과 〈디거〉의 공통점 중 하나다. 어쩌면 이냐리투 감독은 〈디거〉의 모든 것을 공개하면 〈버드맨〉의 자가복제라는 선입견이 일어날까봐, 그래서 작품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할까 기우를 가졌을지 모른다. 이냐리투 감독 본인은 생각 못했어도 영화에 참여한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버드맨〉
〈디거〉

〈버드맨〉(왼), 〈디거〉

어디까지나 소재가 비슷할 뿐이지, 〈버드맨〉과 〈디거〉는 분명히 다르다. 주인공 캐릭터 역시 리건은 철 지난 스타에서 명배우로 입지를 다지고 싶은 인물이라면, 커티스는 이미 인정받은 배우로서 입지가 있다. 〈버드맨〉은 리건과 그를 연기한 마이클 키튼의 개인사가 겹쳐지는 영화라면, 〈디거〉는 작품 속 ‘화석 바보들’과 현재 정세가 겹쳐지는 영화다. 이렇게 꽤 다른 영화지만, ‘연극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의 이야기’라고 요약한다면 오해할 만하다. 아마도 그런 식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진작에 해당 부분을 감추려고 했을 것이라 추측해볼 만 한다.

관객의 충격을 관객에게도

그러나 그것 때문만이라고 하기엔 〈디거〉가 짊어지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공개되지 않은 내용은 관객에게 분명 좋지 않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할리우드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작품의 내용을 숨겨야 한다는 건 그 숨김 자체가 관객에게 필요한 요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디거〉
〈디거〉

작중 ‘화석 바보들’은 굉장히 오랜만에 발굴돼 재연되는 작품으로 나온다. 특히 〈디거〉는 이 작품이 다시 첫 공개되는 날의 리허설이다. 단 3명의 배우로 꾸려졌던 오리지널 ‘화석 바보들’이 전설처럼 퍼져있는 시대에 명배우와 화려한 세트로 무장한 새로운 ‘화석 바보들’이 처음 선보이는 날이다. 이날 무대를 본 관객들이라면 각자 마음 속에 상상하고 있던 ‘화석 바보들’이 완전히 파괴되는 순간을 맛보았을 것이다. 〈디거〉가 극중극이란 형식을 숨긴 건 어쩌면 작중 ‘화석 바보들’의 관객들이 느꼈을 우상 파괴의 감각을 〈디거〉를 보는 관객들도 고스란히 느끼길 유도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디거〉 케니 (제시 플레먼스)
〈디거〉 케니 (제시 플레먼스)

그렇게 〈디거〉는 ‘명감독과 스타 배우가 출연한 블랙코미디’라는 관객들의 이미지를 파괴하고 우뚝 선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디거〉는 이미지를 파괴해야만 했나 물어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디거〉의 가장 기묘한 인물, 케니를 돌아봐야 한다. 작중 디거의 조카이자 당시 실제 사건의 목격자이며 당사자인 케니는 아예 이 작품이 실제와 다른 것은 상관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투자한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돈? 인기? 아니면 정말로 명작의 부활? 아무튼 그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 사실을 전복하거나 왜곡하더라도 새로운 시각에서 사건을 재구성하고, 보는 대중에게 어떤 감정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 〈디거〉로 목격할 수 있는 자본 혹은 예술의 모습이다.

〈디거〉는 구체적 현실을 파괴하는 ‘화석 바보들’을 공연한다는 극중극 방식을 사용, 오히려 현실에 가깝게 다가온다. 케니의 선택이 곧 ‘화석 바보들’이란 작품을 다시금 관객 앞에 불러냈다. 우리는 실체를 모르는 누군가의 결정에 따라 우리가 볼 수 있는 예술의 범주가 결정된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촌극은 아무리 뛰어난 풍자라고 해도 결국은 누군가가 지원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어쩌면 할리우드의 대자본을 빌려 〈디거〉를 만든 이냐리투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좋든 나쁘든, 그동안 당신이 보았던 영화가 좋든 나쁘든, 그것은 누군가의 선택과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으로 그렇게 예술은 형성되고 있다. 혹은 그런 지지를 해주는 사람들로 인해서 예술은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디거〉는 자신을 숨긴 방법으로 질문을 관객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해답을 찾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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