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력에 적힌 약속을 보며 반가움보다 한숨이 먼저 새어 나오는 날이 있다. 막상 나가면 괜찮겠지 싶어 옷을 고르고 집을 나서지만, 모임이 끝난 뒤에는 괜히 갔다는 후회가 며칠씩 남는다.
누구 하나 큰 실수를 한 것도 아니고 다툰 일도 없는데 마음은 유난히 무겁다. 중년 이후에는 이런 자리가 하나둘 생긴다.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시간을 쓰고 돌아온 자신이 텅 빈 듯해 더 지치는 것이다.
비교가 대화의 전부가 될 때
오랜만에 만난 동창끼리 자녀의 직장이나 결혼, 손주 이야기를 묻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안부로 시작한 질문이 누가 더 잘사는지 확인하는 겨루기로 바뀌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한 사람이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 더 먼 곳에 다녀온 경험이 이어지고, 건강검진 이야기는 더 비싼 병원 이야기로 덮인다. 듣는 사람도 가만히 있기 어려워 자기 형편을 부풀리거나 웃음 뒤로 마음을 감추게 된다. 헤어진 뒤 남는 것은 친구를 만난 기쁨보다 주눅 들었다는 씁쓸함뿐이다.
돈 이야기만 되풀이되는 친목 모임도 기운을 빼앗는다. 재테크나 집값, 연금에 관한 정보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만날 때마다 누가 무엇으로 이익을 봤는지만 오가면 다른 삶은 끼어들 자리를 잃는다.
요즘 읽은 책이나 새로 시작한 취미를 꺼내려다가 분위기와 맞지 않을까 봐 입을 다물기도 한다. 모임은 여러 사람의 삶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성적표를 대조하는 자리가 된다. 돌아오는 길에는 얻은 정보보다 나만 뒤처졌다는 불안이 더 크게 남는다.
공감도 지나치면 소진된다
가장 오래 마음을 붙드는 것은 불평과 원망으로 채워진 자리다. 자식이 연락하지 않는다는 서운함, 배우자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답답함,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탄식이 몇 시간씩 이어진다. 처음에는 누구나 진심으로 들어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다른 주제를 꺼내도 다시 불만으로 돌아오면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어두워진다. 해결책을 찾자는 뜻보다 답답함을 쏟아 놓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관계가 나빠서라기보다 한쪽은 계속 털어놓고 다른 쪽은 계속 받아 안는 흐름이 굳어져 지치는 것이다.
이럴 때 관계를 단번에 끊을 필요는 없다. 먼저 만나는 횟수와 머무는 시간을 조금 줄이는 방법이 있다. 오래 앉아 마음이 바닥날 때까지 버티기보다 다음 일정이 있다는 식으로 미리 끝낼 시각을 정해 두는 편이 낫다.
대화의 방향을 바꾸는 말도 준비할 수 있다. “돈 이야기 말고 요즘 재미있었던 일도 들어보고 싶습니다”처럼 상대방을 탓하지 않고 원하는 주제를 꺼내면 된다. 불평이 길어질 때는 “속상한 마음은 알겠습니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습니다”라며 조용히 경계를 세울 수 있다.
돌아오는 길의 마음을 살핀다
모임을 판단할 기준은 이름이나 인원수가 아니라 돌아오는 길의 마음이다. 편안했는지,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었는지, 다음 만남을 생각해도 숨이 막히지 않는지 살펴보면 된다. 매번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남의 무거운 감정까지 짊어져야 한다면 거리를 조절해도 괜찮다.
오래된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관계의 수보다 서로의 하루를 덜 무겁게 만드는 태도가 중요하다. 만나고 나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몇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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