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1억 아들 사업에 보태줬는데..” 3년 뒤 손주가 건넨 편지에 눈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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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직장에서 버텨 낸 대가로 받은 퇴직금은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돈입니다. 그 돈으로 남은 노후를 꾸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식이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하면 부모의 마음은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 돈이 한순간에 사라졌을 때,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돈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올해 예순여섯이 된 최병길 씨는 대전의 한 공기업에서 32년 동안 근무하다 6년 전 정년퇴직했습니다.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했고, 회식 자리에서도 술잔을 반만 채우며 버텼습니다. 그렇게 받은 퇴직금이 1억 5천만 원이었습니다.
그 32년 동안 병길 씨는 자신을 위해 쓴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 구두 밑창이 닳으면 수선해서 신었고, 양복은 두 벌로 10년을 버텼습니다. 아들이 대학에 다닐 때는 아들 등록금과 하숙비를 대느라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가장 싼 메뉴로만 골랐습니다. 퇴직금 통장을 처음 받아 든 날, 병길 씨는 아내와 마주 앉아 “이제 우리도 좀 살아 봅시다” 하며 웃었습니다.
병길 씨와 아내 혜숙 씨는 그 돈으로 소박한 노후를 꿈꿨습니다. 평생 못 가 본 제주도 한 달 살기도 해 보고, 무릎이 아픈 아내의 치료비도 넉넉히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퇴직한 지 석 달 만에 외아들 민우가 찾아왔습니다.
서른다섯의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커피 회사에서 일하다가, 자기 카페를 차리는 것이 오랜 꿈이었습니다. 아들은 노트북을 펼쳐 사업 계획서를 보여 주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아버지, 대전 신도심에 좋은 자리가 났어요. 1억만 보태 주시면 제가 2년 안에 꼭 갚을게요.”

아내 혜숙 씨는 반대했습니다. “여보, 그 돈은 우리 노후 자금이에요. 장사라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병길 씨도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사업 계획서를 설명하는 아들의 얼굴에서, 젊은 시절 꿈을 접고 회사에 들어갔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나는 평생 하고 싶은 일 한 번 못 해 보고 남의 회사에서 늙었다. 우리 아들만큼은 제 꿈을 펼쳐 보게 해 주고 싶다.’ 병길 씨는 결국 아내를 설득했습니다. “여보, 아들 인생 한 번 믿어 봅시다.”
다음 날 병길 씨는 퇴직금 통장에서 1억 원을 아들에게 보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끌어안고 “아버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라고 몇 번이고 말했습니다. 석 달 뒤 대전 신도심에 아들의 카페가 문을 열었습니다. 개업식 날 병길 씨는 아들이 내려 준 커피를 마시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처음 1년은 손님이 꽤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바로 옆 건물에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두 곳이나 들어서면서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습니다. 임대료는 오르고 원두값까지 치솟았습니다. 아들은 대출을 받아 버텨 보려 했지만, 결국 개업 2년 만에 카페 문을 닫았습니다.

폐업하던 날, 아들은 부모님 집에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해요. 아버지 퇴직금 다 날렸어요. 제가 무슨 낯으로… 정말 죄송합니다.”
병길 씨는 아들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습니다. “됐다. 사업이 다 그런 거다. 몸만 상하지 마라.” 그러나 그날 이후 아들은 부모님 집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전화를 걸어도 짧게 받고 끊었고, 명절에도 며느리와 손주만 보내고 자신은 “일이 있다”며 오지 않았습니다.
병길 씨 부부의 생활은 빠듯해졌습니다. 남은 퇴직금 5천만 원과 연금으로는 아내의 무릎 수술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병길 씨는 예순셋의 나이에 동네 아파트 단지의 경비 일을 시작했습니다. 공기업 간부로 은퇴한 사람이 경비복을 입고 분리수거장을 정리하는 모습에, 옛 동료들은 혀를 찼습니다.
아내 혜숙 씨는 밤마다 한숨을 쉬었습니다. “여보, 돈은 그렇다 쳐도 민우가 저렇게 연락을 끊으니 너무 서운해요. 우리가 원망이라도 할까 봐 그러는 걸까요?” 병길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돈을 잃은 것보다 아들을 잃은 것 같은 허전함이 더 아팠습니다.
가끔 며느리가 손자를 데리고 오면 병길 씨는 넌지시 아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며느리는 “잘 지내요, 아버님. 요즘 일이 바빠서요”라고만 대답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도 얼버무릴 뿐이었습니다. 병길 씨는 혹시 아들이 아버지 돈을 날린 것을 두고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또 어디서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밤마다 뒤척였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흘렀습니다. 올가을 병길 씨의 예순여섯 번째 생일날이었습니다. 경비 근무를 마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며느리가 열 살 손자 하준이를 데리고 와 있었습니다. 며느리는 미역국을 끓여 놓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생신 축하드려요. 애 아빠는… 오늘도 일이 있어서요.”
병길 씨는 서운한 마음을 감추며 웃었습니다. 그때 손자 하준이가 쭈뼛거리며 할아버지에게 다가왔습니다. 손에는 하얀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습니다. 봉투는 제법 두툼했습니다.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이거 제가 쓴 편지예요. 그리고 안에 아빠가 할아버지 드리라고 한 것도 있어요. 아빠가 할아버지 앞에서는 절대 열지 말라고 했는데… 저는 할아버지가 지금 봤으면 좋겠어요.”
병길 씨는 의아한 얼굴로 봉투를 열었습니다. 맨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손자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저는 요즘 아빠가 좀 걱정돼요. 아빠는 낮에는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해요. 집에 오면 새벽이라 저는 아빠 얼굴을 주말에만 봐요. 그런데 아빠가 그러는데, 할아버지 돈을 다 갚을 때까지 할아버지 집에 못 간대요. 할아버지 얼굴 볼 면목이 없대요.]
[할아버지, 아빠 미워하지 마세요. 아빠는 할아버지를 엄청 좋아해요. 아빠가 밤에 할아버지 사진 보면서 운 적도 있어요. 그리고 제 돼지저금통에 있던 3만 7천 원도 넣었어요. 아빠 빚 빨리 갚으라고요. 할아버지 사랑해요. 하준 올림.]
편지 밑에는 아들 민우의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통장 표지에는 아들의 글씨로 ‘아버지 퇴직금’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3년 동안 매달 60만 원, 70만 원씩 빠짐없이 입금된 내역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마지막 잔액은 2,437만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에는 ‘최하준 37,000원’이라는 입금 내역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병길 씨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연락을 끊은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밤낮으로 오토바이와 대리운전으로 버티며 아버지의 퇴직금을 한 푼 두 푼 갚아 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 혜숙 씨도 통장을 받아 들고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우리 민우가… 3년 동안 이렇게… 서운하다고만 했던 내가 너무 미안하네요.” 며느리가 고개를 숙인 채 울먹였습니다. “아버님, 애 아빠가 다 갚기 전에는 절대 말씀드리지 말라고 해서… 죄송해요.”
병길 씨는 손자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며느리에게 물었습니다. “아가, 민우 지금 어디 있냐.” “오늘도 대리운전 나갔어요. 아마 시내 쪽에 있을 거예요.”
병길 씨는 경비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민우야, 아버지다. 지금 어디냐. 일 그만하고 아버지 좀 보자.” 수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아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 하준이가 편지 드렸어요?”
한 시간 뒤, 대전 시내의 한 포장마차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 섰습니다. 3년 만이었습니다. 헬멧 자국이 선명한 아들의 얼굴은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버지, 아직 다 못 갚았어요. 조금만 더…”

병길 씨는 말없이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3년 동안 쌓인 서운함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녀석아… 아버지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네가 필요했다. 돈은 잃어도 되지만 아들은 잃으면 안 되는 거다.”
두 사람은 포장마차에 앉아 우동 두 그릇과 어묵 한 접시를 시켰습니다. 아들은 국물을 한 숟가락 떠 넣으며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병길 씨는 통장을 아들의 손에 다시 쥐여 주었습니다. “이 돈은 하준이 학비로 넣어 둬라. 아버지 퇴직금은 네가 이 3년 동안 다 갚았다. 오늘 하준이 편지 한 장으로 다 받았다.”
송희구의 소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에는 퇴직 후 무너져 가는 한 가장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뒤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결국 가족입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서로를 향한 믿음은 한번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 어렵습니다.
자식에게 큰돈을 보태 줄 때는 냉정하게 따져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노후 자금은 부모의 마지막 안전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실패한 자식 앞에서는 원망보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먼저 손을 내밀 때, 자식은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주말, 3년 만에 아들 민우가 아내와 하준이를 데리고 부모님 집에 왔습니다. 혜숙 씨는 아들이 좋아하던 김치찌개를 한 솥 끓였습니다. 하준이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할아버지, 이제 아빠랑 자주 와도 돼요?” 하고 물었습니다. 병길 씨는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습니다. “그럼, 매주 와도 된다.”
창밖으로 가을 햇살이 거실 가득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퇴직금 1억 원은 사라졌지만, 노부부의 식탁에는 그보다 훨씬 귀한 것이 다시 돌아와 앉아 있었습니다. 3만 7천 원짜리 손자의 사랑과, 3년을 버텨 낸 아들의 진심이 그날 거실을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습니다.
출처 :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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