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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 자식 결혼식마다 30만원씩 냈는데..” 내 아들 결혼식 방명록을 보고 손이 떨렸다

책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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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경조사 봉투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관계의 무게가 됩니다. 누구 집 잔치에 얼마를 했는지, 누가 와 주었는지가 오랜 우정의 성적표처럼 남기도 합니다. 그래서 봉투를 건넬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는 “언젠가 나도”라는 기대가 함께 들어갑니다.

광주 북구에 사는 박정호 씨는 올해 예순여덟입니다. 35년 동안 구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8년 전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아내 김옥희 씨와 함께 연금으로 소박하게 살며, 외아들 하나를 키워 서울로 보냈습니다.

정호 씨에게는 40년 넘게 이어 온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었습니다. 열다섯 명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밥을 먹고, 봄가을에는 함께 산에 올랐습니다. 정호 씨는 그 모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습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며 쌓인 피로도 동창들과 술 한잔 나누면 다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모임에서 정호 씨는 늘 궂은일을 도맡았습니다. 식당 예약을 하고, 산행 코스를 짜고, 회원 경조사가 생기면 가장 먼저 단톡방에 소식을 올렸습니다. 친구들은 “정호 없으면 이 모임 안 돌아간다”며 그를 치켜세웠습니다. 정호 씨는 그 말이 듣기 좋았습니다.

10년 전부터 동창들의 자식들이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호 씨는 결혼식이 서울이든 부산이든 빠짐없이 찾아갔습니다. 봉투에는 언제나 30만 원을 넣었습니다. 공무원 연금으로 살림하는 형편에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친구 사이에 체면을 구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 옥희 씨는 가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습니다. “여보, 다른 사람들은 10만 원도 한다던데 우리만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정호 씨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40년 친구들이오. 우리 아들 장가갈 때 다 돌아올 거요.”

정호 씨는 결혼식뿐 아니라 동창 부모님의 장례식에도 꼬박꼬박 조의금을 보냈습니다. 모임에서 총무를 맡은 친구가 형편이 어려워 회비를 못 낼 때는 몰래 대신 내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동창 자식 결혼식 열한 번에 낸 축의금만 330만 원이었습니다.

옥희 씨는 꼼꼼한 성격이라 그 모든 봉투를 가계부 맨 뒷장에 적어 두었습니다. 날짜와 친구 이름, 금액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적혀 있었습니다. 정호 씨는 그런 아내를 보며 “뭘 그런 걸 다 적어” 하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5월, 드디어 정호 씨의 외아들 결혼식이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정호 씨는 한 달 전부터 동창 단톡방에 청첩장을 올리고,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당연히 가야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결혼식 날, 정호 씨는 하객을 맞으며 연신 입구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식이 시작될 때까지 동창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식장에 온 동창은 세 명뿐이었습니다. 정호 씨는 서울까지 먼 길이라 그렇겠지 하고 애써 마음을 달랬습니다.

식이 끝나고 폐백실에서 아들 내외의 절을 받는 동안에도 정호 씨는 자꾸 휴대전화를 확인했습니다. 혹시 늦게라도 오는 친구가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휴대전화는 끝내 조용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광주 집으로 돌아온 날 밤, 옥희 씨가 방명록과 축의금 장부를 펼쳤습니다. 정호 씨는 아내 옆에 앉아 장부를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던 정호 씨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열한 명의 동창 가운데 직접 온 사람은 세 명이었습니다. 네 명은 계좌로 5만 원씩을 보냈고, 나머지 네 명은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중에는 정호 씨가 딸 결혼식에 30만 원을 하고 장인어른 장례식에 조의금까지 보낸 모임 회장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날 회장 친구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골프장에서 환하게 웃는 사진이었습니다. 날짜를 보니 정호 씨 아들의 결혼식 날이었습니다.

정호 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장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친구는 한참 만에 전화를 받더니 “아이고, 깜빡했네. 요즘 정신이 없어서” 하고 웃어넘겼습니다. 사과 한마디 없는 그 웃음소리가 정호 씨의 귓가에 오래도록 맴돌았습니다.

옥희 씨는 가계부 맨 뒷장과 축의금 장부를 나란히 펼쳐 놓았습니다. 한쪽에는 10년 동안 정호 씨가 낸 330만 원이, 다른 한쪽에는 동창들에게 돌아온 돈이 적혀 있었습니다. 직접 온 세 친구의 봉투를 합쳐도 100만 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동창 단톡방에 회장 친구가 글을 올렸습니다. [요즘 경조사 문화가 너무 부담스럽다. 우리 모임도 이제 축의금은 5만 원으로 통일하자.] 몇몇 친구들이 곧바로 “좋은 생각이다”라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정호 씨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서운함보다 더 크게 밀려온 것은 허탈함이었습니다. 40년 우정이라고 믿었던 것이, 남의 잔치에서는 받고 내 잔치에서는 끊어 버리는 계산이었던 것입니다.

옥희 씨가 정호 씨의 손을 잡았습니다. “여보, 돈이 아까워서 속상한 거 아니잖아요. 당신이 그 사람들한테 진심이었으니까 속상한 거지.” 정호 씨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 밤 정호 씨는 서랍 깊숙이 넣어 둔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꺼냈습니다. 까까머리 소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웃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도시락 반찬 하나도 나눠 먹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정호 씨는 앨범을 덮으며 그 시절이 이제 사진 속에만 남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달 동창 모임 날, 정호 씨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친구들의 시선이 모였습니다.

“내가 10년 동안 자네들 자식 결혼식에 빠짐없이 갔네. 봉투도 늘 30만 원씩 했지. 그게 아까워서 하는 말은 아니네. 그런데 내 아들 결혼식 날 골프장에 있었던 친구도 있고, 내 잔치가 끝나자마자 축의금을 줄이자는 이야기가 나오더군. 이제야 알겠네. 이 모임에서 나만 진심이었던 거야.”

정호 씨는 그동안 맡아 온 모임 장부를 총무에게 건넸습니다. “오늘로 나는 이 모임을 그만두겠네. 그동안 고마웠네.” 회장 친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한 달 뒤, 회장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다음 달 막내아들이 결혼한다는 청첩장이었습니다. 정호 씨는 한참 문자를 바라보다가 짧은 축하 인사와 함께 5만 원을 보냈습니다. 그것이 그 친구가 정해 준 두 사람 사이의 값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결혼식에 직접 왔던 세 친구 중 한 명인 최만수 씨가 정호 씨 집을 찾아왔습니다. 만수 씨는 택시를 몰며 어렵게 사는 친구였습니다. 그런데도 결혼식 날 서울까지 새벽 기차를 타고 와서 3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넸던 친구였습니다.

“정호야, 모임 그만뒀다며. 잘했다. 그런데 우리 넷은 그대로 만나자. 나는 니가 우리 아버지 장례식 때 사흘 내내 빈소 지켜 준 거 평생 못 잊는다.”

정호 씨는 친구의 거친 손을 꼭 잡았습니다. 열다섯 명의 동창이 아니라, 진짜 친구 세 명이 남았다는 것이 오히려 든든했습니다.

그 뒤로 정호 씨와 세 친구는 매달 둘째 주 토요일마다 만났습니다. 회비도 없고 총무도 없었습니다. 밥값은 돌아가며 냈고, 형편이 어려운 달에는 서로 묻지 않고 대신 냈습니다.

첫 모임 날 저녁, 정호 씨 부부와 만수 씨는 동네 보리밥집에 마주 앉았습니다. 커다란 양푼에 열무김치와 나물, 된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는 소박한 밥상이었습니다. 만수 씨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너희 어머니가 싸 주던 도시락 생각난다.” 세 사람은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함께 평등하자던 약속이 어느새 자기에게만 유리한 규칙으로 바뀌는 모습은 사람 사이에서도 흔히 일어납니다. 받을 때와 줄 때 셈법이 달라지는 관계라면 이미 우정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경조사 봉투는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우정을 증명하는 성적표는 아닙니다. 그래도 한쪽만 주고 다른 쪽은 받기만 하는 관계라면 정리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친구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늙어서 곁에 남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올가을 정호 씨는 세 친구와 함께 무등산 중봉에 올랐습니다. 능선을 따라 은빛 억새가 바람에 물결쳤고, 저 아래 광주 시내가 늦은 오후 햇살에 아련하게 빛났습니다. 네 친구는 바위에 나란히 앉아 오래도록 그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출처 : ‘동물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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