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도 위 전선이 몇 달째 그대로라면, 그 전쟁은 정말 잦아든 것일까.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이 보여준 답은 ‘아니다’였고, 지금 우크라이나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022년 2월 24일 시작됐다. 이 전쟁은 올해 6월 10일 1568일째를 맞으며 1차 세계대전과 같은 길이에 도달했고, 그다음 날부터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보다 오래 이어진 전쟁이 됐다. 10월 말 현재 개전 1700일을 넘긴 상태다. 그런데 전쟁 기간이 길어질수록 국제사회의 시선은 오히려 멀어지고 있다. 장기전이 지지를 어떻게 소진시키는지, 장기전에서 흔히 나타나는 착각을 순위별로 정리했다.
1위. “전선이 안 움직이면 전쟁도 소강상태다”
최근 2년간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은 포병과 함께 무인기(드론)를 핵심 타격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접촉선의 위치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러시아의 한 친정부 군사평론가는 약 1년 동안 “우리 군이 말라 토크마치카를 해방하고 있다”는 발언을 되풀이했고, 이 말은 온라인에서 조롱성 밈이 됐다.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주에 있는 이 마을은 전쟁 전 인구가 200명 안팎에 불과했다. 작은 마을 하나를 두고 공방이 1년 가까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전투가 멈춘 것이 아니라 고착됐다는 의미다.
1차 세계대전도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 1914년에는 개전, 독일군의 파리 진격, 제1차 마른 전투처럼 전황이 크게 요동치는 사건이 이어졌다. 이후 서부전선은 참호선을 따라 굳어졌고, 수년 동안 막대한 병력을 소모하고도 전선이 거의 바뀌지 않는 소모전이 계속됐다. 극적인 장면이 줄었다고 해서 전쟁의 강도까지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2위. “더 급한 전쟁이 생기면 앞선 전쟁은 뒤로 미뤄도 된다”
올해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전격 공습했고, 이어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됐다. 이후 국제사회의 관심은 중동으로 급격히 옮겨갔다. 중동발 충격은 3월 금융시장까지 흔들었다. 반면 우크라이나 전선 소식은 주요 보도에서 밀려났다. 개전 초기와 비교하면 차이가 뚜렷하다.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가 무너지지 않고 버틴 사실과 헤르손 탈환이 연일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2023년에는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가 같은 해 8월 전용기 추락으로 숨졌다. 2024년 말에는 북한군이 러시아 쿠르스크주 수자 탈환 작전에 투입돼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다. 이는 6·25전쟁 정전 이후 북한이 처음으로 외국 전쟁에 개입한 사례로 기록됐다.
3위. “지원 피로는 잠깐 지나가는 현상이다”
개전 직후 폴란드는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수용했다. 독일·프랑스·영국 등은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때까지 지원하겠다고 공언했다. 서울 남산타워도 우크라이나 국기의 파란색과 노란색 조명을 밝혔고, 2023년 7월에는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키이우를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폴란드 국민 가운데 절반가량이 우크라이나 피란민 지원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 내부에서도 ‘승리까지 지원’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협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전장의 변화가 멈춘 것은 아니다. 양측은 무인 항공·지상 체계를 대규모로 투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보당국은 북한군이 이 전쟁에서 포병 운용과 무인기 정찰·타격 경험을 쌓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선이 고정된 동안에도 전쟁 방식은 계속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1차 세계대전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장기전에서는 화력과 병력만큼 후방의 여론과 동맹의 지속력이 승패를 가른다. 관심이 식는 속도가 전선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빠를 때, 전쟁은 더 길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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