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 제사 비용 20년 혼자 냈는데..” 유산 나누던 날 동서들이 한 말에 결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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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며느리라는 자리는 오랫동안 당연한 의무처럼 여겨졌습니다. 제사를 모시고, 시부모를 챙기고, 명절마다 온 식구의 밥상을 차리는 일이 맏며느리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가 당연해질수록 고마워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충남 공주에 사는 윤정희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3형제 중 맏이인 남편 김상호 씨와 결혼해 40년 넘게 맏며느리로 살아왔습니다. 남편은 군청에서 30년을 일하다 정년퇴직했고, 부부는 공주 시내 낡은 아파트에서 연금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20년 전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의 제사는 모두 정희 씨 몫이 되었습니다. 시조부모 기제사와 시어머니 기제사, 설과 추석 차례까지 1년에 여섯 번이었습니다. 제사 때마다 장을 보는 데만 50만 원 넘게 들었고, 정희 씨는 그 돈을 한 번도 동서들에게 나눠 내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사 전날이면 정희 씨는 새벽같이 시장에 나가 생선과 과일을 고르고, 하루 종일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쳤습니다. 기름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맏며느리가 해야 할 일이라 여기며 묵묵히 버텼습니다.

둘째 동서는 서울에, 셋째 동서는 대전에 살았습니다. 두 동서는 제사 때마다 늦게 와서 일찍 돌아갔습니다. “형님, 저희는 길이 멀어서요.” 그러면서 빈손으로 오는 날도 많았습니다. 정희 씨는 서운했지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명절이면 동서들은 차례상이 다 차려진 뒤에야 도착했습니다. 그러고는 “형님 음식 솜씨가 최고예요” 하며 상 앞에 앉았다가, 설거지가 시작될 무렵이면 차가 막힌다며 서둘러 일어섰습니다. 정희 씨는 산더미 같은 그릇을 혼자 씻으며 한숨을 삼켰습니다.
시아버지는 시골집에서 혼자 지내셨습니다. 정희 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시골집에 들러 반찬을 채워 넣고, 병원에 모시고 다녔습니다. 시아버지가 넘어져 고관절 수술을 받았을 때도 석 달 동안 병실을 지킨 사람은 정희 씨였습니다.
그사이 동서들은 명절에 시아버지께 봉투 하나 내밀고 돌아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시아버지는 그런 맏며느리를 볼 때마다 “네가 고생이 많다”며 손을 꼭 잡아 주셨습니다. 정희 씨는 그 한마디에 고단함을 잊었습니다.
정희 씨에게는 오래된 습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사 때마다 쓴 돈을 작은 공책에 적어 두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라 살림하는 사람의 버릇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나자 그 공책은 어느새 세 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정희 씨가 독감에 걸려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제사 음식을 준비한 적도 있었습니다. 동서들에게 도와 달라고 전화했지만 둘째는 아이 시험 때문에, 셋째는 회사 일 때문에 못 온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정희 씨는 제사상을 물리고 그대로 쓰러져 이틀을 앓아누웠습니다.

그리고 올봄, 시아버지가 아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에도 빈소를 지키고 조문객을 맞은 사람은 정희 씨 부부였습니다. 동서들은 상복을 입고 앉아 있다가 밤이 되면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시아버지가 남긴 것은 시골집 한 채와 논 몇 마지기였습니다. 다 합쳐 3억 원 남짓이었습니다. 49재를 마친 다음 날, 세 형제 부부가 시골집 안방에 모여 앉았습니다. 유산을 어떻게 나눌지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법대로 똑같이 나누자. 아버지도 그걸 원하셨을 거다.” 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희 씨도 그 말에 불만이 없었습니다. 유산을 더 받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정희 씨는 그 자리에서 시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병상에서 정희 씨의 손을 잡고 “네가 우리 집 기둥이다. 내가 없어도 너 혼자 다 짊어지지 마라”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의 뜻을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둘째 동서가 웃으며 말을 꺼냈습니다. “그럼 유산은 똑같이 나누고요, 제사는 큰집에서 계속 지내 주셔야죠. 큰집이니까요.”
셋째 동서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럼요. 형님은 맏며느리시니까 지금까지 하신 것도 당연한 거고요. 저희는 길이 멀어서 어쩔 수 없잖아요.”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정희 씨는 손에 쥔 찻잔을 내려놓았습니다. 20년 동안 혼자 지낸 제사와 혼자 낸 제사 비용, 혼자 지킨 병실이 “당연한 것”이라는 한마디로 정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정희 씨는 가방에서 공책 세 권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동서들 앞에 조용히 펼쳐 놓았습니다.

“동서들, 이건 내가 20년 동안 제사 지내며 쓴 돈을 적은 공책이네. 한 해에 여섯 번, 20년이면 120번이야. 장 보는 데만 6천만 원이 넘게 들었네. 아버님 병원비랑 간병한 날은 적지도 않았어.”
동서들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정희 씨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이걸 돌려 달라는 게 아니네. 유산도 똑같이 나누는 게 맞다고 생각하네. 다만 오늘로 내가 혼자 짊어지던 제사는 끝내려고 하네.”
정희 씨는 남편과 미리 상의해 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앞으로 기제사는 한날에 모아 1년에 한 번만 지내겠네. 그리고 그 제사는 세 집이 해마다 돌아가며 맡기로 하세. 장 보는 비용도 맡은 집이 내고. 올해는 둘째네부터 하게.”

둘째 동서가 당황해 손사래를 쳤습니다. “형님, 저희 집은 서울이라 좁아서요.” 정희 씨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20년 동안 우리 집이 넓어서 한 게 아니네. 마음이 있으면 좁은 집에서도 지낼 수 있어. 정 어려우면 절에 모시는 방법도 있으니 알아보게.”
남편 상호 씨가 아내 곁에 섰습니다. “내가 맏이라고 그동안 집사람한테만 다 맡겼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이 말을 못 한 게 한이다. 이제부터는 형제가 똑같이 하자.”
두 동생은 형의 단호한 목소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동서들은 공책을 넘겨 보며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120번의 제사상이 빼곡히 적힌 공책 앞에서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날 밤 셋째 동서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형님, 그동안 제가 너무 철이 없었어요. 올해 제사는 저희가 둘째 형님네랑 같이 준비할게요. 형님은 이번엔 손님으로 오세요.]
둘째 동서는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제사를 앞두고 남편을 통해 짧은 부탁이 전해졌습니다. 제사 준비를 해 본 적이 없으니 형님이 장보기 목록만 적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희 씨는 웃으며 20년 동안 써 온 제사 공책 한 권을 건넸습니다.

올여름 시아버지 기일, 처음으로 제사가 서울 둘째네 집에서 열렸습니다. 정희 씨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빈손으로 남의 집 제사에 갔습니다. 앞치마 대신 고운 블라우스를 입고, 동서들이 부친 전을 맛보며 웃었습니다.
셋째 동서는 제사가 끝난 뒤 정희 씨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형님, 직접 해 보니 하루 만에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요. 이걸 20년이나 혼자 하셨으니….” 정희 씨는 웃으며 동서의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제사를 마치고 공주로 내려온 날 저녁, 정희 씨 부부는 공산성 아래 오래된 식당에서 도토리묵밥 두 그릇을 시켰습니다. 시원한 육수에 묵과 김치를 듬뿍 올린 소박한 밥상이었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40년 동안 고생 많았소. 이제는 우리 둘이 편하게 삽시다.” 정희 씨는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고전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서자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차별 속에 살다가, 끝내 집을 떠나 스스로 자신의 길을 엽니다. 당연하다고 여겨진 자리에 묶여 있기만 하면 그 자리는 영원히 나의 짐으로 남습니다.

가족 사이의 일은 누군가 혼자 짊어질 때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짐이 당연해지면 고마움은 사라지고 서운함만 쌓입니다. 혼자 지고 있던 짐이 있다면, 기록을 남기고 때가 되면 분명하게 나누자고 말하세요. 그것이 가족을 지키는 길입니다.
올가을 정희 씨는 남편과 함께 공산성 성곽길을 걸었습니다. 금강 위로 붉은 노을이 길게 번졌고, 성벽을 따라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성곽 위에 나란히 서서 해가 다 질 때까지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출처 : ‘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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