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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에게 부모님 산소 관리비 10년 보냈는데..” 성묘 가서 본 산소 앞에서 결단했다

책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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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산소를 돌보는 일은 오랫동안 집안의 큰 도리로 여겨졌습니다. 벌초를 하고 성묘를 다니며 부모님의 뜻을 기리는 일은 자식들이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한 사람에게만 맡겨 두면, 믿음이 어느새 방치로 바뀌기도 합니다.

강원 원주에 사는 홍말순 씨는 올해 일흔셋입니다. 남편 이종국 씨와 함께 원주 중앙시장에서 35년 동안 이불 가게를 했습니다. 남편은 12년 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말순 씨는 가게를 정리한 뒤 원주 시내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남편의 고향은 횡성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시부모님 산소는 고향 집 뒷산 양지바른 곳에 나란히 모셔져 있었습니다. 남편은 살아생전 해마다 벌초를 빠뜨리지 않았고, 한식과 추석이면 직접 술 한 병을 들고 산에 올랐습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말순 씨의 손을 잡고 부탁했습니다. “여보, 우리 부모님 산소 잘 부탁하오. 내가 못 가면 애들이라도 꼭 챙기게 해 주오.” 말순 씨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말순 씨에게는 삼 남매가 있었습니다. 큰아들 정우는 횡성 읍내에서 농기계 대리점을 하고 있었고, 둘째 딸과 막내아들은 서울에 살았습니다. 장례 뒤 두 해 동안은 말순 씨가 직접 벌초를 챙겼지만, 무릎이 나빠지자 큰아들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엄마, 산소는 제가 가까이 사니까 맡을게요. 엄마는 무릎도 안 좋으신데 오시지 마세요.”

말순 씨는 큰아들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매달 10만 원씩 산소 관리비를 큰아들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벌초 비용과 성묘 때 드는 술값, 제물값에 보태라는 뜻이었습니다. 큰아들은 처음 몇 해 동안 벌초를 마치면 산소 사진을 휴대전화로 보내 주었습니다.

말순 씨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마음이 놓였습니다. 깔끔하게 깎인 봉분과 비석 앞에 놓인 술잔을 보며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불 가게를 정리하고 수입이 줄어든 뒤에도 산소 관리비만큼은 한 달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명절이면 큰아들은 원주에 와서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왔어요. 풀이 많이 자라서 혼났어요” 하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말순 씨는 그런 큰아들에게 고생했다며 용돈 봉투를 하나 더 쥐여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큰아들이 보내는 사진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해마다 같은 각도, 같은 날씨의 사진이었습니다. 말순 씨가 “올해도 다녀왔니?” 하고 물으면 큰아들은 “그럼요, 걱정 마세요” 하고 짧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사이 말순 씨는 무릎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뒤 재활 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에 올해는 지팡이 없이도 제법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순 씨는 결심했습니다. “올 추석에는 내 발로 시부모님 산소에 가 봐야겠다.”

큰아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엄마, 산길이 험해서 안 돼요. 제가 다 해 놨으니 그냥 집에 계세요.” 그러나 말순 씨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말순 씨는 서울 사는 둘째 딸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둘째 딸은 전화를 받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엄마, 사실 저도 몇 년 전에 오빠한테 같이 벌초 가자고 했는데, 자기가 다 했다고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말순 씨는 그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습니다.

추석 다음 날 아침, 말순 씨는 딸의 차를 타고 횡성 산골 마을로 향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산소로 오르는 오솔길은 잡초와 칡넝쿨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딸이 낫으로 길을 내며 앞장섰고, 말순 씨는 딸의 팔을 붙잡고 한 걸음씩 산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산소 앞에 도착한 순간, 말순 씨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봉분은 허리까지 자란 풀에 덮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한쪽은 빗물에 무너져 흙이 패어 있었습니다. 비석에는 이끼가 시퍼렇게 끼어 시부모님 이름조차 읽히지 않았습니다.

산 아래 밭에서 일하던 마을 할아버지가 다가와 혀를 찼습니다. “아이고, 종국이네 산소구먼. 몇 해째 아무도 안 오길래 자손이 끊긴 줄 알았소.” 말순 씨는 그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말순 씨는 떨리는 손으로 무너진 봉분의 흙을 쓸어 담았습니다. 12년 전 남편의 마지막 부탁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여보, 미안하오. 내가 당신 부모님을 이렇게 모셨구려.” 딸도 옆에서 소매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날 저녁, 말순 씨는 큰아들의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큰아들은 어머니의 흙 묻은 바지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큰아들이 털어놓았습니다. “가게 대출 이자가 밀려서… 관리비를 거기에 썼어요. 사진은 예전 걸 다시 보냈고요.”

말순 씨는 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가방에서 통장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10년 동안 큰아들에게 보낸 관리비가 한 줄 한 줄 찍혀 있는 통장이었습니다. 모두 1,200만 원이었습니다.

“정우야, 돈이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말을 했어야지. 내가 네 사정을 몰라줄 엄마냐. 그런데 거짓 사진까지 보내며 네 아버지 부탁을 팔지는 말았어야 했다.” 큰아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깨를 떨었습니다.

말순 씨는 그 자리에서 세 가지를 정했습니다. 이제부터 산소 관리비는 큰아들에게 보내지 않는다는 것, 벌초는 산림조합의 벌초 대행 서비스에 직접 맡긴다는 것, 그리고 큰아들은 그동안 받은 돈을 매달 조금씩 산소 관리 통장에 갚아 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뒤 말순 씨는 삼 남매를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막내아들은 형에게 서운한 말을 쏟아 내려다 어머니의 눈짓에 입을 다물었습니다. 말순 씨가 말했습니다. “형을 탓하려고 부른 게 아니다. 너희 아버지 부모님을 너희 셋이 같이 모시라고 부른 거다.”

말순 씨는 산소 관리 통장을 새로 만들어 장부와 함께 둘째 딸에게 맡겼습니다. “이제부터 산소 일은 너희 셋이 같이 해라. 돈이 얼마 들어오고 얼마 나갔는지 장부에 적어서 단체방에 올리고.” 막내아들도 해마다 벌초 날에는 반드시 내려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해 늦가을, 말순 씨는 삼 남매와 함께 다시 산소에 올랐습니다. 산림조합에서 깔끔하게 벌초를 마친 봉분 위로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무너졌던 한쪽에는 새 떼가 입혀졌고, 이끼를 걷어 낸 비석에는 시부모님 이름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그날 산소 앞에 엎드려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죄송합니다.” 말순 씨는 큰아들의 등을 한 번 쓸어 주었습니다. 꾸짖을 일은 꾸짖었으니, 이제는 다시 함께 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뒤, 말순 씨 가족은 횡성 장터의 오래된 막국숫집에 둘러앉았습니다. 메밀 향이 진한 막국수에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부어 먹는 소박한 한 끼였습니다. 둘째 딸이 말했습니다. “엄마, 아버지가 이 집 막국수 좋아하셨잖아요.” 말순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큰아들 그릇에 편육 한 점을 얹어 주었습니다.

이문구 작가의 연작소설 『관촌수필』은 사라져 가는 고향 마을과 할아버지, 그 땅을 지키던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뿌리를 지키는 일은 누군가에게 떠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마음을 모아야 비로소 이어지는 일입니다.

집안의 중요한 일을 한 사람에게만 맡기면 처음의 고마움이 어느새 무관심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돈을 보낼 때는 어디에 쓰이는지 함께 확인하고, 큰일일수록 형제들이 함께 나누어 지게 하세요. 그것이 부모의 뜻을 오래 지키는 길입니다.

올가을 말순 씨는 둘째 딸과 함께 횡성호 호수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잔잔한 호수 위로 붉게 물든 산자락이 비쳤고, 저녁 햇살이 물결 위에 금빛으로 부서졌습니다. 말순 씨는 딸의 팔짱을 끼고 해가 질 때까지 호숫가를 걸었습니다.

출처 : ‘관촌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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