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 친구 딸 혼수 500만원 해줬는데..” 3년 뒤 받은 아기 사진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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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함께한 친구는 때로 가족보다 더 깊은 사이가 됩니다. 기쁜 날도 슬픈 날도 함께 나눈 친구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남은 사람의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깁니다. 그리고 친구가 남기고 간 부탁은 남은 사람의 평생 숙제가 되기도 합니다.
경기 수원에 사는 장경숙 씨는 올해 예순일곱입니다. 남편과 함께 수원 팔달문 근처에서 35년 동안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두 아들을 키워 모두 출가시켰고, 지금도 매일 아침 일곱 시면 세탁소 문을 엽니다.
경숙 씨에게는 고향 충남 서천에서 함께 자란 단짝 친구 미영이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한 동네에서 자랐고, 스무 살에 함께 수원으로 올라와 봉제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서로의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서 주고, 아이를 낳으면 미역국을 끓여 준 사이였습니다.

미영이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딸 수아가 세 살 때 집을 나가 연락이 끊겼고, 미영이는 혼자 식당 일을 하며 딸을 키웠습니다. 경숙 씨는 그런 친구가 안쓰러워 수아를 세탁소에 데려다 밥을 먹이고, 학교 준비물을 챙겨 주곤 했습니다.
수아는 경숙 씨를 “이모”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아들만 둘인 경숙 씨에게 수아는 딸 같은 아이였습니다. 수아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는 미영이와 경숙 씨가 세탁소 뒷방에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대학 시절 수아는 방학마다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다림질하는 경숙 씨 옆에서 옷에 번호표를 달며 재잘거리던 수아 덕분에 세탁소는 늘 웃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경숙 씨는 일한 돈보다 훨씬 많은 용돈을 쥐여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6년 전, 미영이가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경숙 씨는 세탁소 일을 남편에게 맡기고 매일 병원에 들러 친구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미영이가 경숙 씨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경숙아, 우리 수아 시집갈 때 내가 없잖아. 네가 엄마 노릇 좀 해 줄래? 혼수 이불 하나라도 해 줄 사람이 없어서….” 경숙 씨는 울음을 삼키며 대답했습니다. “걱정 마. 내가 다 해 줄게.”
미영이의 장례식장에는 찾아오는 친척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빈소를 지킨 것은 경숙 씨 부부와 수아뿐이었습니다. 발인 날 수아는 경숙 씨의 손을 놓지 않았고, 경숙 씨는 그 작은 손을 꼭 쥐며 친구와의 약속을 다시 새겼습니다.
미영이를 보내고 난 뒤, 스물네 살의 수아는 세상에 혼자 남았습니다. 경숙 씨는 수아를 자주 불러 밥을 먹였습니다. 명절이면 경숙 씨네 식구들과 함께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3년 전, 수아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랑은 부산에서 온 성실한 회사원이었습니다. 수아가 수줍게 청첩장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모, 혼주석에 엄마 대신 앉아 주실 수 있어요?”

경숙 씨는 남편과 상의해 세탁소를 하며 부어 온 적금을 깼습니다. 그리고 500만 원으로 수아의 혼수를 마련했습니다. 미영이가 그토록 해 주고 싶어 했던 목화솜 이불을 직접 맞추고, 그릇과 수저 세트도 하나하나 골랐습니다.
남편은 한마디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미영 씨가 우리 애들 어릴 때 얼마나 챙겨 줬소. 그 은혜 갚는 거요.” 결혼식 날 경숙 씨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혼주석에 앉았습니다. 신부 입장 때 수아가 경숙 씨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자 경숙 씨는 손수건을 적시고 말았습니다.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수아는 세탁소에 들러 경숙 씨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습니다. 상자 안에는 미영이가 생전에 끼던 낡은 은가락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모가 갖고 계셔 주세요. 엄마도 그걸 원하실 거예요.” 경숙 씨는 그 가락지를 세탁소 계산대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수아는 남편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전화가 왔지만, 낯선 도시에서 새 살림을 꾸리느라 연락은 점점 뜸해졌습니다. 경숙 씨는 서운하기보다 잘 살고 있겠지 하며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세탁소에서 이불을 개다가 수아 생각이 났습니다. 그 아이가 부산에서 외롭지는 않을까, 엄마 생각에 울고 있지는 않을까. 경숙 씨는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괜히 부담이 될까 싶어 다시 내려놓곤 했습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보며 말했습니다. “궁금하면 전화해 보지 그러오.” 경숙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시집간 딸은 친정 생각 안 나게 잘 사는 게 효도래요. 소식 없는 게 잘 산다는 소식이지요.”
그리고 이번 달 초, 경숙 씨의 휴대전화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수아에게서 온 문자였습니다. 문자에는 사진 한 장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볼이 통통하게 오른 아기가 목화솜 이불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아래에는 긴 글이 이어졌습니다. [이모, 저 석 달 전에 엄마 됐어요. 연락 자주 못 드려서 죄송해요. 사실 2년 동안 아기가 안 생겨서 병원 다니느라 마음이 힘들었어요. 이모가 해 주신 이불 덮고 매일 기도했어요.]
경숙 씨는 손을 떨며 다음 글을 읽었습니다. [아기 이름은 경미예요. 이모 이름 ‘경’ 자랑 우리 엄마 이름 ‘미’ 자를 하나씩 받았어요. 우리 경미한테는 할머니가 두 분이에요. 다음 주 백일잔치에 꼭 와 주세요. 외할머니 자리는 이모 자리예요.]
경숙 씨는 세탁소 계산대 앞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다림질하던 남편이 놀라 달려왔다가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는 함께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3년 전 깨 버린 적금 500만 원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름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수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이모, 혼수 이불 해 주신 거, 엄마가 부탁하셨던 거 알아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그러셨어요. 경숙이 이모가 너한테 엄마가 되어 줄 거라고요.” 경숙 씨는 수화기를 든 채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백일잔치 날, 경숙 씨 부부는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수아는 경숙 씨를 보자마자 달려와 품에 안겼습니다. 경숙 씨는 경미를 처음 안아 들고 속으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미영아, 우리 손녀 좀 봐라.” 그리고 세탁소 서랍에서 챙겨 온 미영이의 은가락지를 꺼내 아기의 작은 손에 살며시 쥐여 주었습니다. 수아는 그 모습을 보며 말없이 눈물을 훔쳤습니다.
잔치를 마친 저녁, 세 사람은 수아네 집 근처 오래된 돼지국밥집에 마주 앉았습니다. 뽀얀 국물에 부추를 듬뿍 얹은 돼지국밥 세 그릇이 김을 내며 놓였습니다. 수아가 말했습니다. “이모, 엄마랑 이모가 수원에서 자주 먹었다던 그 국밥 생각나서 여기로 왔어요.” 경숙 씨는 웃으며 수아 그릇에 고기를 한 점 더 덜어 주었습니다.
권정생 선생의 동화 『강아지똥』에서 모두에게 쓸모없다고 외면받던 강아지똥은 빗물에 녹아 민들레 뿌리로 스며들고, 마침내 노란 꽃 한 송이를 피워 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어 준 작은 마음이 누군가의 삶에 꽃을 피웁니다.

누군가를 위해 건넨 정성은 당장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진심은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정을 건네 보세요. 그 마음이 언젠가 가장 따뜻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올가을 경숙 씨는 남편과 함께 광교호수공원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호숫가 나무마다 붉고 노란 단풍이 곱게 들었고, 잔잔한 물 위로 저녁 햇살이 금빛으로 반짝였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 휴대전화 속 경미의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습니다.
출처 : ‘강아지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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