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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생활비 매달 25만원 보냈는데..” 5년 뒤 손자가 꺼낸 말 한마디에 손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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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어려울 때 부모는 제 끼니를 줄여서라도 손을 내밉니다.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묻지 않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묻지 않는 사랑이 때로는 자식을 거짓말에 기대게 만듭니다.

경북 영양군에 사는 권순례 씨는 올해 일흔입니다. 스물셋에 시집와 47년째 고추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남편은 6년 전 폐렴으로 먼저 떠났고, 순례 씨는 산비탈 고추밭 두 마지기를 혼자 일구며 삽니다. 슬하에는 대구에 사는 외아들 박재성 씨가 있고, 며느리 이미경 씨와 열한 살 손자 준우가 있습니다.

며느리 미경 씨는 처음부터 살가운 편은 아니었습니다. 결혼 첫해 고추를 따러 왔다가 반나절 만에 손이 맵다며 울먹였고, 순례 씨는 “됐다, 들어가 쉬어라” 하고 혼자 밭을 마저 땄습니다. 대신 미경 씨는 셈이 밝았습니다. 순례 씨가 읍내 장터에서 고추를 헐값에 넘기는 걸 보고 택배 직거래를 알려 준 것도 며느리였습니다. 그 덕에 고추 값을 제대로 받은 해, 순례 씨는 며느리에게 금목걸이를 사 주었습니다.

5년 전 가을, 아들이 다니던 자동차 부품 공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해 추석, 미경 씨가 부엌에서 전을 부치다 말고 말했습니다. “어머님, 준우 아빠가 일자리를 못 구해서 관리비도 밀렸어요. 염치없지만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아들은 마루 끝에 앉아 담배만 태웠습니다.

순례 씨는 그날 밤 장롱 속 적금 통장을 꺼냈습니다. 남편 장례를 치르고 남은 돈에 고추 판 돈을 보태 모아 둔 통장이었습니다. “한 달에 25만 원씩 보내마. 재성이가 일 구할 때까지만이다.” 미경 씨는 두 손을 모으고 “어머님, 꼭 갚을게요” 하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날부터 순례 씨는 매달 25일이면 버스를 타고 읍내 은행에 나갔습니다. 벽에 걸린 달력에는 25일마다 빨간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졌습니다. 고추 따는 철에 일꾼 둘을 부르던 것을 하나로 줄였고, 무릎 주사도 석 달에 한 번으로 미뤘습니다.

해가 바뀌어도 아들의 취직 소식은 없었습니다. 명절마다 순례 씨가 넌지시 물으면 미경 씨가 먼저 대답했습니다. “요즘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요, 어머님.” 며느리의 옷차림이 해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보면서도 순례 씨는 모른 척했습니다. 아들 기를 죽일까 봐 더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다섯 해 동안 보낸 돈이 1,400만 원을 넘었습니다.

올해 추석은 유난히 볕이 좋았습니다. 마당 멍석 위에는 태양초가 붉게 깔려 있었고, 처마 밑에는 덜 마른 고추 자루가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아들 내외는 연휴 첫날 오후에 내려왔습니다. 미경 씨는 새로 산 듯한 베이지색 코트를 벗어 방에 걸었습니다.

준우는 할머니 곁에 쪼그려 앉아 고추 꼭지 따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매운 냄새에 코를 찡그리던 아이가 문득 고개를 들었습니다. “할머니, 저 다음 달에 비행기 타요. 아빠 회사 사람들이랑 제주도 간대요.”

순례 씨의 손에서 고추 한 개가 툭 떨어졌습니다. “아빠 회사? 아빠가 회사를 다니냐?” 준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습니다. “네. 아빠 회사 다닌 지 3년 됐는데 가족 여행은 처음이래요. 그래서 엄마가 새 옷도 샀어요.”

마루에서 송편을 빚던 미경 씨의 손이 멈췄습니다. 아들은 고개를 돌려 담장 쪽만 바라보았습니다. 순례 씨는 고추 꼭지를 쥔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떨림이 매운 기운 때문인지 서러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재성아, 이리 와 봐라. 아가, 너도.” 순례 씨는 준우를 이웃집 할머니네로 마실 보낸 뒤 두 사람을 안방에 앉혔습니다. 아들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엄마, 3년 전에 물류 회사에 들어갔어요.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미경 씨가 말을 가로챘습니다. “어머님, 처음엔 계약직이라 언제 잘릴지 몰라서요. 대출 이자에 준우 학원비에, 정말 빠듯했어요.”

순례 씨는 벽에서 달력을 떼어 와 방바닥에 펼쳤습니다. 빨간 동그라미가 줄지어 있었습니다. “계약직이라 겁났던 건 첫해다. 그다음 두 해는 무슨 핑계냐.” 순례 씨는 조목조목 짚었습니다. “작년 설에 너는 내 앞에서 아직 면접만 보러 다닌다고 했다. 올여름 내가 무릎이 아프다고 할 때도 너는 생활비 얘기만 했다. 나는 그 25만 원 보내려고 일꾼 하나를 덜 쓰고 땡볕에 혼자 밭에 엎드렸다.”

아들에게도 말했습니다. “재성아, 너는 더 나쁘다. 네 엄마가 그 돈을 어떻게 모으는지 뻔히 알면서 입을 닫았다. 아내 눈치가 보였으면 전화 한 통이라도 했어야지.” 아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습니다.

순례 씨는 숨을 고르고 결정을 일렀습니다. “생활비는 오늘로 끝이다. 지난 3년 치 900만 원은 내 손에 돌려줄 필요 없다. 대신 준우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매달 25만 원씩 넣어라. 3년 동안 한 달도 거르지 말고, 넣을 때마다 통장 사진을 나한테 보내라. 내 돈이 거짓말에 쓰였으니, 이제라도 아이를 위해 바르게 쓰여야겠다.”

미경 씨는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처음엔 꼭 갚으려고 했는데, 받다 보니 당연해졌어요.” 순례 씨는 대답 대신 며느리 앞으로 손수건을 밀어 주었습니다.

연휴가 끝나고 열흘 뒤, 순례 씨의 휴대전화에 사진 한 장이 왔습니다. 준우 이름이 찍힌 새 통장 첫 장에 25만 원이 적혀 있었습니다. 순례 씨는 그달 25일, 읍내에 나가 미뤄 둔 무릎 주사를 맞았습니다.

자식을 돕는 마음에는 조건이 없어야 하지만, 도움의 기한과 이유는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알려 달라고 미리 말해 두고, 가끔은 직접 물어보세요. 묻지 않는 것이 배려처럼 보여도, 오래 쌓이면 서로에게 짐이 됩니다.

받는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돈은 부모의 땀과 건강을 덜어 낸 돈입니다. 사정이 달라졌다면 가장 먼저 부모에게 알리는 것, 그것이 도움을 받은 사람의 마지막 도리입니다.

올가을 순례 씨는 고추를 모두 거둔 뒤 반변천 둑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빈 고추밭에는 서리가 내려 하얗게 반짝였고, 강 건너 산자락은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순례 씨는 이제 떨리지 않는 손으로 목도리를 여미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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