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제 수술비 1800만원 대줬는데..” 2년 뒤 매제가 놓고 간 메모 한 장에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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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사이에도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결혼으로 맺어진 처남과 매제 사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큰돈을 건네고도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듣지 못하면 서운함이 먼저 마음에 내려앉기 마련입니다.
충남 논산에 사는 오상철 씨는 올해 예순여덟입니다. 시 외곽 국도변에서 30년 넘게 작은 화원을 꾸려 왔습니다. 아내와 둘이 비닐하우스 두 동에서 꽃과 화분을 기르고, 개업식이나 장례식장에 화환을 실어 나릅니다. 그 일을 함께해 온 것이 25년 된 1톤 트럭이었습니다. 외아들은 대전에서 직장에 다니고, 아래로 여덟 살 터울인 여동생 미경 씨가 있습니다.
미경 씨의 남편 한동수 씨는 같은 논산에서 자동차 정비 일을 했습니다. 스무 살 때부터 공업사에서 일한 정비사였지만 말수가 유난히 적었습니다. 30년 전 처음 인사를 오던 날에도 동수 씨는 무릎을 꿇은 채 “잘 부탁드립니다” 한마디만 하고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상철 씨 눈에는 기름때가 밴 그의 손톱만 들어왔습니다.
그 뒤로도 동수 씨는 처남을 어려워했습니다. 명절에 모이면 술잔을 받아 놓고 마루 끝에 앉아 있다가 먼저 일어섰습니다. 한번은 상철 씨 트럭이 배달 길에 시동이 꺼져 애를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미경 씨 연락을 받고 달려온 동수 씨는 말없이 보닛을 열고 10분 만에 고쳐 놓았습니다. 상철 씨가 수고비를 쥐여 주려 하자 손사래만 치고 돌아갔습니다. “저 사람은 고맙다는 말도, 받으라는 말도 다 어렵구먼.” 상철 씨는 웃으며 혀를 찼습니다.
2년 전 겨울, 동수 씨가 쉬는 날 집 앞 빙판길에서 미끄러지며 오른 손목을 크게 다쳤습니다. 인대가 끊어지고 뼈가 어긋나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 뒤로도 몇 달 동안 재활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두 아이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모아 둔 돈도 없었고, 실손보험도 들어 두지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미경 씨가 화원에 찾아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습니다. “오빠, 수술비랑 재활 병원비가 1800만 원쯤 나온대. 그이는 일을 못 하고, 나는 어디 손 벌릴 데가 없어.” 상철 씨는 아내와 눈을 마주쳤습니다. 화원 수입을 쪼개 6년 동안 부어 온 적금이 있었습니다. 낡은 트럭을 바꾸려고 모은 돈이었습니다.
그날 밤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트럭은 몇 년 더 타면 되지요. 사람 손은 때를 놓치면 끝이에요.” 상철 씨는 다음 날 적금을 깨 1800만 원을 미경 씨 통장으로 보냈습니다. “갚을 생각 말고 손이나 잘 고치라고 해라.”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동수 씨에게서는 전화 한 통이 없었습니다. 명절에 만나도 “형님” 하고 고개만 꾸벅 숙인 뒤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었습니다. 상철 씨는 서운했습니다. 돈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고맙다는 말 한마디쯤은 들을 줄 알았습니다.
미경 씨는 오빠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습니다. “그이가 손이 떨려서 공구를 못 잡아. 일 그만둔다는 걸 겨우 붙잡고 있어.” 상철 씨는 그 말을 듣고도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트럭은 점점 더 늙어 갔습니다. 언덕을 오를 때면 엔진이 쇳소리를 냈고, 짐칸 문짝에는 녹이 번져 구멍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지난겨울 어머니 기일에 모였을 때 상철 씨는 지나가듯 말했습니다. “봄 되면 저 트럭도 보내야겠다. 화환 배달은 이제 그만둘까 싶다.” 그 말에 동수 씨가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습니다.
얼마 뒤 아내가 대전 아들네에 손주를 봐 주러 일주일만 다녀오자고 졸랐습니다. 화원은 비수기였고, 상철 씨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습니다. 트럭 열쇠는 늘 그랬듯 운전석 햇빛 가리개에 꽂아 둔 채였습니다.
일주일 뒤 이른 아침, 상철 씨는 혼자 먼저 내려와 화원으로 나갔습니다. 3월 초의 공기는 아직 찼고, 들판에는 옅은 안개가 깔려 있었습니다. 비닐하우스 앞에 다다른 상철 씨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습니다.
트럭이 서 있던 자리에 낯선 트럭 한 대가 서 있었습니다. 녹슨 데 하나 없이 하얗게 칠해진 차체, 새로 단 짐칸 문짝, 반짝이는 앞 범퍼. 그런데 번호판은 분명 상철 씨 트럭의 것이었습니다. 운전석 문 아래에는 25년 전 첫 배달 때 화분에 긁힌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상철 씨는 운전석 문을 열었습니다. 계기판 위에 접힌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였습니다. ‘형님 덕에 다시 잡은 스패너입니다.’
열쇠를 돌리자 엔진이 한 번에 걸렸습니다. 쇳소리 대신 고르고 낮은 소리가 났습니다. 상철 씨는 핸들을 잡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때 국도변에 낡은 승용차 한 대가 섰습니다. 미경 씨와 동수 씨, 그리고 대전에서 따라 내려온 아내였습니다. 미경 씨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오빠, 그이가 재활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겠다고 했어. 손이 떨려서 볼트 하나를 못 조였거든. 그런데 오빠가 트럭 보낸다는 말 듣고 나서 달라졌어. 다시 일하는 첫 일은 형님 트럭이어야 한다고.”
동수 씨는 일주일 동안 밤마다 화원에 와서 엔진을 뜯었다고 했습니다. 손이 떨리면 쉬었다가 부품을 하나씩 갈았고, 마지막 사흘은 퇴근 뒤 공업사로 트럭을 몰고 가 차체를 펴고 칠을 했습니다. 아내는 미경 씨의 부탁을 받고 남편을 대전으로 데려간 것이었습니다. “고모가 하도 신신당부를 해서요. 당신한테는 끝까지 말하지 말라고.”
“부품값은 그이가 공업사 다시 나가서 받은 첫 월급으로 샀어.” 미경 씨의 말에 상철 씨는 동수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동수 씨가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 처남 앞에 내밀었습니다. 손목에 긴 수술 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형님,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손으로 갚고 싶었습니다.”
상철 씨는 그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굳은살이 다시 앉기 시작한 손이었습니다. “이 사람아, 갚긴 뭘 갚아. 2년 동안 나는 자네가 섭섭하기만 했네. 내가 미안하네.” 상철 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날 점심, 상철 씨는 동수 씨를 조수석에 태우고 읍내 식당으로 트럭을 몰았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마주 앉아 잔을 나누었습니다. 동수 씨는 그날 30년 동안 한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했습니다.
고마움을 말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끝내 말로는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사가 늦다고, 말이 없다고 마음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걸려도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로 그 마음을 돌려줍니다.
누군가를 도왔다면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시간을 넉넉히 기다려 주세요. 서운함은 잠시 내려놓고 지켜봐 주는 것, 그것이 도움을 끝까지 완성하는 일입니다.
올가을 상철 씨는 새로 칠한 트럭에 노란 국화 화분을 가득 싣고 탑정호 근처 마을 잔치에 배달을 갔습니다. 조수석에는 쉬는 날이라며 따라나선 동수 씨가 앉아 있었습니다. 저수지 위로 저녁 햇살이 번졌고, 트럭은 고른 엔진 소리를 내며 호숫가 길을 천천히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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