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부가 함께 모은 돈에는 숫자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함께 아끼고 함께 참으며 그린 꿈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돈이 한쪽의 결정만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돈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경북 포항에 사는 김정순 씨는 올해 예순여덟입니다. 남편 박만식 씨와 함께 포항 죽도시장에서 35년 동안 수산물 도매 가게를 했습니다. 새벽 세 시면 경매장에 나가 생선을 받아 오고, 해가 질 때까지 얼음 상자를 나르며 삼 남매를 키웠습니다.
몇 해 전 가게를 정리한 부부는 포항 시내 오래된 아파트에서 연금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평생 바다 비린내를 맡으며 살아온 부부에게는 오래된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편의 칠순에 맞춰 둘이서 유럽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10년 전, 정순 씨는 그 꿈을 위해 적금을 들었습니다. 매달 25만 원씩 10년을 부으면 3,000만 원이 되는 적금이었습니다. 시장에서 거래하던 수협 창구에서 가입하느라 통장은 남편 이름으로 만들고, 정순 씨 통장에서 매달 자동이체가 되게 해 두었습니다. 정순 씨는 그때만 해도 그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순 씨는 반찬값을 아끼고 옷 한 벌 사는 것도 미루며 한 달도 빠짐없이 적금을 부었습니다. 냉장고 문에는 남편과 함께 오려 붙인 유럽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알프스 산자락과 파리의 에펠탑 사진을 볼 때마다 고된 하루가 조금은 가벼워졌습니다.
남편에게는 사업을 한다며 자주 손을 벌리던 남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시동생은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와 “형님, 이번만 도와주세요” 하며 돈을 빌려 갔고, 제대로 갚은 적은 없었습니다. 정순 씨는 그럴 때마다 속이 상했지만 남편의 동생이라 모른 척 넘어갔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시동생이 빌려 간 돈만 해도 2,000만 원이 넘었습니다. 그중 돌아온 돈은 명절에 들고 온 과일 상자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정순 씨는 동서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형님 체면에 서운한 티를 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4년 전, 정순 씨는 남편에게 다짐을 받았습니다. “여보, 앞으로 시동생 돈 문제는 나랑 상의 없이 절대 하지 마요. 우리도 이제 벌이가 없잖아요.”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습니다. 정순 씨는 그 약속을 수첩에 적어 날짜까지 써 두었습니다.
정순 씨에게는 시장에서 장사하며 생긴 습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큰돈이 오가는 일은 꼭 수첩에 적고, 은행에 갈 때마다 적금 이체 내역을 뽑아 모아 두는 것이었습니다. 10년 가까이 모은 이체 내역서가 서랍 속 고무줄 묶음으로 두툼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올봄, 적금 만기를 몇 달 앞두고 정순 씨는 여행사에 상담을 받으러 갔습니다. 직원이 내민 일정표를 보며 정순 씨는 가슴이 설렜습니다. “보름 일정이면 둘이서 넉넉하게 다녀오실 수 있어요.” 정순 씨는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적금 통장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통장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며칠이 지나도 남편은 통장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느낌이 든 정순 씨는 남편이 외출한 사이 장롱 서랍을 열어 보았습니다.
통장 맨 마지막 장에는 ‘중도 해지’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습니다. 날짜는 두 달 전이었습니다. 정순 씨가 10년 가까이 부은 돈 2,900만 원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뒤였습니다. 정순 씨는 통장을 든 채 장롱 앞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날 저녁, 정순 씨는 식탁 위에 통장을 올려놓았습니다. 남편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동생 공장이 넘어가게 생겼다길래… 당신한테 말하면 반대할 것 같아서 그랬소. 금방 갚는다고 했소.”
남편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습니다. “칠순 전까지 다시 채워 놓으면 당신은 모를 줄 알았소. 동생이 석 달 안에 갚는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소.” 정순 씨는 그 말을 들으며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10년 동안 냉장고 문에 붙여 둔 유럽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정순 씨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랍에서 고무줄로 묶은 이체 내역서 뭉치와 수첩을 꺼냈습니다. “여보, 이건 내가 10년 동안 반찬값 아껴서 부은 돈이에요. 그리고 4년 전에 당신이 나랑 상의 없이 동생 돈 문제는 안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여기 날짜까지 적혀 있어요.”
남편은 수첩에 적힌 자기 약속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정순 씨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시동생이랑 동서 불러 주세요. 내가 직접 이야기할게요.”
그 주 토요일, 시동생 부부가 정순 씨 집을 찾아왔습니다. 정순 씨는 이체 내역서와 해지 내역을 식탁 위에 차례로 펼쳐 놓았습니다. “서방님, 이 돈은 형님 돈이 아니라 내가 10년 동안 부은 우리 부부 칠순 여행 돈이에요.”

동서는 그 자리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남편이 형님에게 또 돈을 빌린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형님, 저는 정말 몰랐어요. 이 사람이 공장 빚은 다 정리됐다고만 했거든요.” 동서는 시동생의 팔을 붙잡고 울먹였습니다.
시동생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형수님, 죄송합니다. 형님한테 매번 손 벌리는 게 부끄러워서 형수님께는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갚을게요.” 정순 씨는 그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어 왔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정순 씨는 미리 써 온 종이 한 장을 시동생 앞에 내밀었습니다. 2,900만 원을 빌렸다는 차용증이었습니다. “서방님, 형제 사이에 이런 거 쓰는 게 서운하겠지만, 이번만큼은 꼭 받아야겠어요. 매달 갚을 날짜와 금액도 적어 두었어요.”
시동생은 한참을 망설이다 차용증에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동서가 시동생의 승용차를 팔아 1,000만 원을 먼저 보내왔습니다. 나머지는 매달 50만 원씩 정순 씨 이름으로 새로 만든 통장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도 그날 이후 달라졌습니다. 그는 집안의 통장과 도장을 모두 정순 씨에게 맡기며 말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집 살림은 당신이 다 하시오. 내가 당신을 너무 쉽게 생각했소.” 그리고 아파트 경비 일을 구해 모자란 여행비를 직접 보태겠다고 했습니다.
정순 씨는 새로 만든 통장을 남편에게 보여 주며 웃었습니다. “이 통장은 내 이름이에요. 앞으로 우리 부부 돈은 둘 다 아는 통장에만 모아요.” 남편은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해 가을, 부부는 계획보다 짧은 열흘 일정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알프스 산자락에 섰을 때, 남편은 정순 씨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10년 동안 이 사진 붙여 놓고 고생한 사람은 당신이었는데, 내가 그걸 몰랐소. 미안하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부부는 죽도시장 골목의 오래된 물횟집에 마주 앉았습니다. 살얼음 동동 뜬 육수에 가자미와 오징어를 듬뿍 썰어 넣은 물회 두 그릇이 상 위에 놓였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역시 유럽 음식보다 이게 낫소.” 정순 씨는 웃으며 남편 그릇에 오징어를 한 점 더 덜어 주었습니다.
현진건의 단편 『빈처』에는 가난한 남편 곁에서 살림을 꾸리며 묵묵히 버티는 아내가 나옵니다. 곁에서 말없이 희생하는 사람의 몫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돈 문제만큼은 투명해야 합니다. 함께 모으는 돈은 누구 이름으로 되어 있는지, 어디에 쓰일지 서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가족을 돕는 일도 배우자와 먼저 상의하세요. 그 상의 한 번이 부부의 믿음을 지켜 줍니다.
올가을 정순 씨는 남편과 함께 영일대 해변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바다 위로 붉은 노을이 번졌고, 해상 누각 너머로 고깃배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며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 나란히 서서 해가 질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출처 : ‘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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