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자식만 챙기기도 벅찬 세상에서 남의 자식까지 품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게 건넨 작은 도움이 그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도움은 때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돌아옵니다.
광주 동구에 사는 윤복순 씨는 올해 일흔둘입니다. 남편과 함께 광주 대인시장 입구에서 30년 동안 작은 문구점을 했습니다. 공책과 연필을 팔며 두 아들을 키웠고, 몇 해 전 남편과 함께 가게를 정리했습니다.
큰아들 준혁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늘 붙어 다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은 반 성민이였습니다. 성민이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몸이 아픈 어머니와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신문 배달을 하느라 늘 피곤한 얼굴이었습니다.

복순 씨는 그런 성민이가 안쓰러웠습니다. 저녁이면 준혁이를 시켜 성민이를 집으로 데려오게 했고, 고봉밥에 반찬을 넉넉히 차려 주었습니다. 성민이는 밥을 먹을 때마다 “어머니, 정말 맛있어요” 하며 두 그릇씩 비웠습니다.
문구점에 들를 때면 복순 씨는 성민이 가방에 공책과 볼펜을 몰래 넣어 주었습니다. 성민이가 미안해하면 남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공부하는 놈한테 공책값 받으면 문구점 주인 자격 없다.” 성민이는 그 말에 고개를 숙이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성민이 어머니는 아들이 복순 씨 집에서 밥을 먹고 온 날이면 꼭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사모님, 염치가 없어서 어쩌지요. 제가 몸이 이래서 애 밥도 제대로 못 챙깁니다.” 복순 씨는 그럴 때마다 “애들 둘이나 셋이나 밥상은 똑같아요” 하며 웃어넘겼습니다.
성민이는 공부를 무척 잘했습니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22년 전 겨울, 성민이는 서울의 한 의과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합격 소식을 전하러 온 성민이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습니다.

“어머니, 저 대학은 못 갈 것 같아요. 등록금이 없어요. 엄마 병원비도 밀려 있어서요.” 성민이는 고개를 떨군 채 말했습니다. 등록금 마감까지는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복순 씨는 남편과 마주 앉았습니다. 문구점을 넓히려고 모아 둔 적금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게는 나중에 넓히면 되지. 저런 아이가 의사가 못 되면 그게 나라 손해요.”
다음 날 복순 씨는 적금을 깨서 500만 원을 봉투에 담아 성민이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갚을 생각은 하지 마라. 의사 돼서 아픈 사람 잘 고쳐 주면 그걸로 된다.” 성민이는 봉투를 받아 들고 문구점 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민이는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첫 학기가 끝나고 성민이에게서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봉투 안에는 성적표 사본과 짧은 글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머니, 장학금 받았어요. 다음 학기 등록금은 제가 해결했습니다. 이 성적표는 어머니께 드리는 첫 번째 효도예요.] 복순 씨는 그 성적표를 문구점 계산대 유리 밑에 끼워 두고 손님들에게 자랑했습니다.
처음 몇 해는 명절마다 연하장이 왔고, 방학이면 문구점에 들러 복순 씨의 손을 잡고 인사했습니다. 그러다 의사가 되고 바쁜 전공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연락은 점점 뜸해졌습니다.
복순 씨는 서운해하지 않았습니다. 의사 일이 얼마나 고된지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준혁이에게 “성민이는 잘 지내냐” 하고 물으면, 준혁이는 “바빠서 저도 연락 못 한 지 오래됐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문구점을 정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준혁이는 광주의 한 회사에서 과장으로 일하며 가정을 꾸렸습니다. 성민이의 이름은 어느새 오래된 추억 속 이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봄, 복순 씨는 한밤중에 며느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님, 준혁 씨가 회사에서 쓰러졌어요.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고 하더니….” 진단은 대동맥 박리였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복순 씨는 떨리는 다리로 대학병원 수술실 앞에 섰습니다. 수술은 여덟 시간 넘게 이어졌습니다. 며느리와 손주들을 끌어안은 채 복순 씨는 수술실 문 위의 ‘수술 중’ 불빛만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수술실 앞 대기실의 시계는 유난히 느리게 흘러갔습니다. 복순 씨는 남편 사진이 든 지갑을 꼭 쥐고 속으로 빌었습니다. “여보, 우리 준혁이 좀 지켜 주시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밤새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수술실 문이 열렸습니다.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복순 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복순 씨의 손을 잡았습니다. “어머니, 저 성민이에요. 준혁이 수술 잘 끝났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복순 씨는 그 자리에서 성민이를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성민이는 이 병원 흉부외과 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응급실에서 환자 이름을 보고 혹시나 해서 달려왔더니, 고등학교 때 단짝이던 준혁이였다고 했습니다.
성민이는 지갑에서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을 꺼냈습니다. 22년 전 복순 씨가 대신 내준 첫 학기 등록금 영수증이었습니다. “어머니, 이걸 20년 넘게 지갑에 넣고 다녔어요. 수술이 힘들 때마다 꺼내 봤어요. 아픈 사람 잘 고쳐 주라고 하셨잖아요.”
준혁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성민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병실을 찾았습니다. 바쁜 회진 중에도 짬을 내 친구의 손을 잡아 주었고, 복순 씨에게는 따뜻한 두유를 사다 주었습니다. 병원 간호사들은 “교수님이 저렇게 웃는 걸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습니다.

퇴원하는 날, 성민이는 복순 씨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 안에는 성민이가 모교에 만든 장학금 안내문이 들어 있었습니다. 장학금의 이름은 ‘대인시장 문구점 장학금’이었습니다. “어머니처럼 형편 어려운 후배들 등록금을 대 주고 싶어서 몇 해 전에 만들었어요. 벌써 열두 명이 받았어요.”
복순 씨는 안내문을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저런 아이가 의사가 못 되면 나라 손해”라고 하던 그날 밤이 떠올랐습니다. 22년 전 봉투 하나가 아들의 목숨이 되고, 또 다른 아이들의 꿈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준혁이도 침대에서 일어나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성민아, 우리 엄마 밥 두 그릇씩 먹던 놈이 내 목숨을 살렸네.” 병실 안에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가득 찼습니다.
며느리는 성민이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교수님 아니었으면 저희 애들 아빠 없는 애들 될 뻔했어요.” 성민이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제수씨, 저는 이 집에 갚을 게 너무 많아요. 이제 겨우 조금 갚은 거예요.”

퇴원한 다음 주, 복순 씨는 성민이와 준혁이를 데리고 대인시장 골목의 오래된 백반집에 갔습니다. 애호박찌개 한 냄비에 나물 몇 가지와 김치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이었습니다. 성민이가 숟가락을 들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때 먹던 밥맛이 이랬어요.” 복순 씨는 웃으며 성민이 밥 위에 반찬을 하나 더 얹어 주었습니다.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에는 가난한 친구를 돕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대가 없이 건넨 작은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지키는 힘이 됩니다.

내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도움은 늘 있습니다. 밥 한 끼, 공책 한 권,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한 아이의 앞날을 바꾸기도 합니다. 오늘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작은 손길 하나를 먼저 내밀어 보세요.
올가을 복순 씨는 준혁이와 함께 광주호 호수생태원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호숫가 나무마다 붉은 단풍이 곱게 물들었고, 잔잔한 물 위로 저녁 햇살이 금빛으로 반짝였습니다. 복순 씨는 아들의 팔짱을 끼고 해가 질 때까지 호숫가를 걸었습니다.
출처 : ‘사랑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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