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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고깃집에 외상 900만원 줬는데..” 석 달 뒤 손님이 건넨 전단에 눈을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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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하는 사람에게 외상 장부는 돈보다 믿음을 적어 두는 공책입니다. 오래 거래한 사이일수록 “다음 달에 드릴게요”라는 말 한마디에 물건을 내주고 날짜만 적어 둡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깨지는 순간은 돈을 잃는 것보다 훨씬 아픕니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에 사는 배동수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동네 시장 어귀에서 32년째 정육점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 다섯 시면 도매시장에 나가 고기를 받아 오고, 카운터는 아내 영례 씨가 봅니다. 아들은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고, 딸은 결혼해 대전에 살고 있습니다.

동수 씨의 가장 큰 거래처는 같은 동네에서 삼겹살집을 하는 오태식 씨였습니다. 태식 씨가 스물아홉에 고깃집을 열던 해부터 25년 동안, 그 가게의 삼겹살과 목살은 모두 동수 씨 가게에서 나갔습니다. 태식 씨는 동수 씨를 “형님”이라 불렀고, 두 집 아이들은 명절이면 서로의 집을 오가며 자랐습니다.

구제역 파동으로 시장 손님이 뚝 끊겼던 해에도 태식 씨는 주문을 줄이지 않았습니다. “형님 가게 문 닫으면 나도 고기 받을 데가 없어요.” 몇 해 뒤 영례 씨가 수술로 입원했을 때는 태식 씨가 점심 장사를 마치고 건너와 저녁까지 정육점 칼을 대신 잡아 주었습니다. 동수 씨는 그 고마움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았습니다.

외상이 시작된 것은 3년 전이었습니다. 고기를 받으러 온 태식 씨가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형님, 요즘 손님이 반으로 줄었어요. 이번 달만 장부에 달아 주세요. 다음 달에 꼭 정리할게요.” 동수 씨는 두말없이 장부를 펼쳤습니다. “자네가 언제 떼먹은 적 있나. 걱정 말고 가져가.”

그러나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외상은 조금 갚고 더 많이 쌓였습니다. 동수 씨는 가게 수입으로 도매상 대금을 메우다 그것도 모자라 부부가 노후에 쓰려고 붓던 적금 하나를 깼습니다. 장부를 넘기던 영례 씨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여보, 벌써 900만 원이에요. 우리도 이제 버티기 힘들어요.”

동수 씨는 그래도 태식 씨를 믿었습니다. “25년을 봤어. 그 사람 그렇게 살 사람 아니야.” 그리고 올여름, 태식 씨가 찾아와 고개를 숙였습니다. “형님, 결국 가게 접습니다. 보증금 정리되면 형님 돈부터 갚을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동수 씨는 오히려 태식 씨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습니다.

석 달이 지나도록 돈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전화를 하면 “일자리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다”는 짧은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동수 씨는 재촉하기가 미안했습니다. 문 닫은 고깃집 앞을 지날 때마다 셔터에 붙은 ‘임대’ 쪽지를 보며 혀를 찼습니다.

시월 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오후였습니다. 오래된 단골손님 하나가 국거리 양지를 사 가며 젖은 전단 한 장을 계산대에 내려놓았습니다. “사장님, 아산 신도시에 큰 고깃집이 새로 생겼대요. 아파트 앞에서 나눠 주더라고요. 경쟁 가게 생겨서 어쩌나 싶어서요.”

동수 씨는 무심코 전단을 집어 들었습니다. ‘숯불 삼겹살 전문점 그랜드 오픈, 개업 기념 전 메뉴 20퍼센트 할인’. 넓은 홀 사진 아래 앞치마를 두른 부부가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동수 씨는 안경을 고쳐 쓰고 다시 보았습니다. 사진 속 남자는 틀림없이 태식 씨였습니다. 전단에 적힌 개업일은 넉 달 전, 옛 가게 문을 닫기 한 달 전이었습니다.

동수 씨는 손이 떨려 칼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날 저녁 시장 채소 도매상 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김 사장은 한참 말이 없다가 털어놓았습니다. “형님네도요? 나도 600만 원 물렸어요. 주류 대리점도 400만 원 못 받았답니다. 다들 사정이 어렵다니까 기다려 준 거지요.”

이튿날 동수 씨는 외상 장부를 들고 신도시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번쩍이는 간판 아래 손님이 북적였습니다. 주방에서 나온 태식 씨는 동수 씨를 보자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형님, 여긴 집사람 명의 가게예요. 저는 일만 거들어요. 옛 가게는 망했으니 지금은 갚을 돈이 없습니다.”

동수 씨는 장부를 펼쳐 보였습니다. “자네가 손님이 반으로 줄었다던 그 달에 여기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었구먼. 내가 화나는 건 900만 원 때문이 아니야. 25년을 형님, 형님 하던 사람이 나를 이렇게 속였다는 거야.” 태식 씨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동수 씨는 밤새 장부를 넘겼습니다. 날짜와 부위, 무게와 금액이 3년 치 빼곡했습니다. 다음 날 부부는 법무사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법무사는 장부와 거래명세서, 입금 기록을 살핀 뒤 말했습니다. “상인이 판 물건값은 3년이 지나면 시효 때문에 받기 어려워질 수 있으니 서두르셔야 합니다.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하면, 상대가 받고 2주 안에 이의를 하지 않을 경우 확정되고 강제집행도 할 수 있습니다. 이의를 하면 정식 재판으로 넘어갑니다.”

동수 씨는 그 자리에서 신청서를 냈습니다. 김 사장도 같은 주에 서류를 냈습니다. 그리고 동수 씨는 장부 맨 뒷장 ‘태식이네’ 거래처 이름 위에 볼펜으로 천천히 두 줄을 그었습니다. “고마웠던 건 고마웠던 대로 두고, 오늘로 끝이야.” 영례 씨가 말없이 남편의 손을 잡았습니다.

오래 쌓은 정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정이 깊다는 이유로 돈의 경계까지 흐려 두면, 그 정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기회를 주게 됩니다. 외상은 믿어서 주는 것이지만, 믿음에도 한도와 기한이 있어야 합니다.

장사를 하든 이웃끼리 돈을 주고받든 날짜와 금액은 꼭 적고, 거래명세서와 입금 기록을 남겨 두세요. “사정이 어렵다”는 말이 되풀이된다면 서운해하기 전에 한 번쯤 그 사정을 확인해 보는 것이 나와 내 가족을 지키는 길입니다.

십일월 첫 일요일, 동수 씨는 가게 문에 ‘오늘 하루 쉽니다’ 쪽지를 붙였습니다. 부부는 태조산 자락 산책로를 천천히 올랐습니다. 붉고 노란 단풍잎이 발밑에 수북했고, 멀리 천안 시내 위로 늦가을 햇살이 엷게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영례 씨가 보온병에서 따른 보리차를 건네자, 동수 씨는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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