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식에게 용돈을 받는 부모의 마음은 고마우면서도 미안합니다. 특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자식이 보내 주는 돈이라면 그 돈을 쓸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받은 돈을 차마 쓰지 못하고 고이 모아 두는 부모도 있습니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최영자 씨는 올해 일흔하나입니다. 남편과 함께 상계동 시장에서 30년 동안 작은 철물점을 하다 몇 해 전 문을 닫았습니다. 남편은 5년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영자 씨는 연금으로 혼자 살림을 꾸리고 있습니다.
영자 씨에게는 외동딸 은정이가 있습니다. 은정이는 대학 동기였던 김태민과 결혼해 두 딸을 낳았습니다. 사위는 택배 기사로 일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물건을 나르며 성실하게 살았지만, 전셋집 대출을 갚느라 살림은 늘 빠듯했습니다.

5년 전 남편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사위는 퇴근길마다 병원에 들러 장인의 손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남편은 마지막 며칠, 사위의 손을 잡고 힘겹게 말했습니다. “태민아, 우리 집사람 혼자 남는 게 제일 걱정이다.” 사위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습니다. “장인어른, 장모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영자 씨 통장에 30만 원이 들어왔습니다. 보낸 사람은 사위였습니다. 영자 씨는 깜짝 놀라 사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네 형편 뻔히 아는데 이게 무슨 돈인가. 당장 도로 가져가게.”
사위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장모님, 장인어른께 약속드린 겁니다. 큰돈은 못 드려도 이건 꼭 받아 주세요.” 그 뒤로 매달 25일이면 어김없이 30만 원이 들어왔습니다. 명절에도, 사위가 몸살로 며칠 일을 쉰 달에도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영자 씨는 그 돈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딸네 살림이 얼마나 빠듯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자 씨는 은행에 가서 통장을 하나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위가 보낸 돈이 들어오는 날이면 한 푼도 빼지 않고 그 통장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딸에게도 비밀로 했습니다. 딸이 알면 사위에게 말할 것이고, 그러면 사위가 서운해할 것 같았습니다. 영자 씨는 연금으로 아껴 살았고, 부족한 생활비는 동네 반찬가게에서 일주일에 사흘씩 일을 해서 채웠습니다.

반찬가게 일은 생각보다 고됐습니다. 새벽같이 나가 나물을 다듬고 전을 부치다 보면 손목이 시큰거렸습니다. 그래도 영자 씨는 일이 끝나면 가게 사장이 싸 주는 반찬을 들고 딸네 집에 들르는 낙으로 버텼습니다. 손녀들은 할머니가 오는 날이면 현관까지 뛰어나왔습니다.
가끔 딸네 집에 가면 손녀들의 낡은 운동화와 작아진 교복이 눈에 밟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통장에서 돈을 꺼내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영자 씨는 꾹 참았습니다. “이 돈은 언젠가 꼭 필요한 날 써야 한다.” 영자 씨는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사이 큰손녀 지유가 고3이 되었습니다. 지유는 엄마 아빠의 고생을 보며 자라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겨울, 지방의 한 국립대학교 간호학과에 합격했습니다. 합격 소식에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기뻐했습니다.
지유가 간호학과를 고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밤마다 할아버지를 살뜰히 돌봐 주던 간호사 선생님을 보고 꿈을 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나도 저런 간호사가 될 거야.” 열네 살 지유의 그 말을 영자 씨는 잊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딸 은정이의 얼굴에 그늘이 졌습니다. 첫 학기 등록금과 기숙사비, 입학 준비물까지 생각하니 막막했던 것입니다. 사위는 그날부터 주말 밤마다 대리운전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영자 씨는 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입학식 날, 영자 씨는 딸네 식구들과 함께 지유의 대학교에 갔습니다. 강당 맨 뒷자리에 앉은 사위는 입학식 내내 휴대전화로 딸의 뒷모습을 찍었습니다. 신입생 대표의 선서가 끝나고 박수가 터지자 사위는 슬그머니 눈가를 훔쳤습니다. 영자 씨는 그런 사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가방 속 통장을 한 번 더 만져 보았습니다.
입학식이 끝나고 교정에서 사진을 찍은 뒤, 영자 씨가 사위를 불렀습니다. “태민이, 잠깐 이리 와 보게. 줄 게 있네.”

영자 씨는 가방에서 통장 하나와 하얀 봉투를 꺼내 사위의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통장 첫 장에는 5년 동안 매달 25일에 들어온 30만 원이 줄지어 찍혀 있었습니다. 모두 1,800만 원이었습니다. 한 번도 돈이 빠져나간 기록은 없었습니다.
“자네가 5년 동안 나한테 준 용돈이네. 한 푼도 안 쓰고 모아 뒀어. 자네가 장인어른한테 한 약속, 나는 다 받았네. 이제 이 돈은 지유 공부하는 데 쓰게.” 영자 씨는 사위의 손등을 토닥였습니다.
사위는 통장을 펼쳐 본 채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덩치 큰 사위가 아이처럼 우는 모습에 딸 은정이도, 손녀들도 따라 울었습니다.

한참 뒤 사위가 젖은 목소리로 털어놓았습니다. “장모님, 사실 그 30만 원 맞추느라 5년 동안 주말마다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나 더 했습니다. 요즘은 등록금 때문에 대리운전까지 나가고 있었고요. 은정이한테도 다 말을 못 했어요. 장인어른께 한 약속이라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딸 은정이는 그 말에 남편의 팔을 붙잡고 더 크게 울었습니다.
영자 씨는 사위의 등을 쓸어 주며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못 썼던 거야. 자네 땀이 묻은 돈인 걸 아니까. 이제 그 땀이 지유 꿈이 되는 걸 보니 나는 더 바랄 게 없네.” 지유가 할머니 품에 안기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아빠, 저 꼭 좋은 간호사 될게요.”
그날 이후 사위는 주말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영자 씨가 “용돈은 이제 그만 보내게” 하자 사위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럼 대신 매주 일요일마다 장모님 모시고 저녁 먹을게요.” 그 약속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습니다.
딸 은정이는 그날 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한참을 울었습니다. “엄마, 5년 동안 반찬가게 일까지 하면서 그 돈을 안 썼던 거야? 나는 엄마가 그 돈으로 편하게 지내시는 줄만 알았어.” 영자 씨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엄마는 그 통장 들여다보는 재미로 5년을 편하게 살았다.”

입학식을 마친 뒤, 다섯 식구는 학교 앞 오래된 중국집에 둘러앉았습니다. 짜장면 다섯 그릇에 탕수육 한 접시가 전부인 소박한 상이었습니다. 지유가 할머니 그릇에 탕수육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입학식 날은 역시 짜장면이죠.” 영자 씨는 웃으며 사위 그릇에 짜장 소스를 한 숟가락 더 덜어 주었습니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비밀의 화원』에서 아이들은 버려진 정원을 아무도 모르게 가꾸어 마침내 꽃이 가득한 화원으로 되살려 냅니다. 남몰래 정성껏 가꾼 마음은 시간이 지나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납니다.

자식에게 받은 돈이 미안하고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그 마음을 꼭 돈으로 돌려줄 필요는 없지만, 받은 정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만큼은 언젠가 꼭 전해 주세요.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오가는 집안은 어떤 어려움도 함께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올가을 영자 씨는 딸, 사위와 함께 경춘선 숲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옛 철길을 따라 노랗고 붉은 단풍이 길게 이어졌고, 저녁 햇살이 침목 위로 금빛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영자 씨는 사위의 팔짱을 끼고 해가 질 때까지 숲길을 걸었습니다.
출처 : ‘비밀의 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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