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집 잔금 5000만원 보탰는데..” 7년 뒤 아들이 걷은 베란다 커튼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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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집을 장만할 때 부모는 통장을 털어서라도 보태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고른 집이 분수에 넘쳐 보이면 마음 한쪽이 편치 않습니다. 내 돈이 허세에 쓰인 것은 아닌가 하는 서운함은 생각보다 오래 남습니다.
충북 청주시 청원구에 사는 정순례 씨는 올해 예순넷입니다. 서른넷에 동네 김치공장에 들어가 올봄까지 꼭 30년을 일했습니다. 배추를 소금물에 절이고 양념을 버무리는 일이었습니다. 김장철이면 새벽 네 시에 장화를 신고 나갔고, 고춧가루 물이 밴 손톱은 일 년 내내 빨갰습니다.
남편 오태식 씨는 화물차를 몰았습니다. 10년 전 간암 진단을 받고 여덟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고향 마을 뒷산 선산에 묻혔습니다. 순례 씨에게는 외아들 민석이 있습니다. 민석은 청주의 한 전자부품 회사에 다니며 아내 은지와 초등학생 딸을 두었습니다.
민석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유난히 따랐습니다. 주말이면 아버지 화물차 조수석에 앉아 대전이며 충주며 따라다녔습니다. 휴게소에서 아버지가 사 준 호두과자 한 봉지를 아껴 먹던 아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입원해 있던 여덟 달 동안에도 퇴근하면 곧장 병실로 가 아버지 발을 주물렀습니다.
남편이 떠나던 날 밤, 민석은 장례식장 마당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고는 순례 씨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버지 혼자 산에 계시면 쓸쓸하시겠다.” 순례 씨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습니다.
7년 전 봄, 민석이 순례 씨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이듬해 분양받은 상당구 아파트의 입주가 다가오는데 잔금이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서류를 보던 순례 씨의 눈이 커졌습니다. 25층, 그 동의 맨 꼭대기 층이었습니다. 같은 동 아래층보다 분양가가 더 높았습니다.
“민석아, 꼭대기 층은 왜 골랐니. 아래층 했으면 잔금 걱정은 없었을 거 아니냐.” 민석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엄마, 그 동 그 층이어야 했어요.” 모자란 돈은 5000만 원이었습니다. 대출을 더 받으면 월급 절반이 이자로 나간다고 했습니다.
순례 씨는 며칠 밤을 뒤척이다 은행에 갔습니다. 공장 다니며 15년 동안 부은 적금 3000만 원을 깨고, 남편 사망보험금 가운데 남겨 둔 2000만 원을 보탰습니다. 통장을 건네며 순례 씨가 말했습니다. “이건 네 아버지랑 내가 같이 주는 거다. 허투루 쓰지 마라.” 민석은 통장을 받아 들고 고개만 숙였습니다.
그 뒤로 7년이 흘렀습니다. 순례 씨는 공장 근처 낡은 빌라에서 혼자 지냈고, 아들네 아파트에는 일 년에 두어 번 갔습니다. 거실 창밖으로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며느리가 “어머님, 전망 좋죠?” 하고 웃으면 순례 씨는 “그래, 좋다” 하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속으로는 서운했습니다. 남들 보기 좋으라고 꼭대기 층을 고집한 것만 같았습니다. 이상한 일도 있었습니다. 안방 옆 작은 베란다에는 늘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습니다. 순례 씨가 열어 보려 하면 민석은 “거기 짐 쌓아 놨어요” 하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올봄 순례 씨는 공장을 그만두었습니다. 30년 동안 쪼그려 앉아 배추를 절인 무릎이 더는 버티지 못했습니다. 민석이 말했습니다. “엄마, 올해부터 아버지 제사는 우리 집에서 지내요. 엄마는 오시기만 하세요.”
지난달 남편의 열 번째 기일이었습니다. 가을비가 그친 오후라 하늘이 유난히 맑았습니다. 순례 씨는 남편이 좋아하던 호두과자 한 봉지를 사 들고 아들네로 갔습니다. 며느리가 차린 상에는 남편이 즐기던 동태전과 고사리나물이 올라 있었습니다.
제사를 마치고 상을 물리자 민석이 순례 씨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늘 커튼이 쳐져 있던 그 작은 베란다 앞이었습니다. 민석은 숨을 한 번 고르더니 커튼을 천천히 걷었습니다.
창밖으로 저녁 햇살에 물든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낮은 능선 아래 소나무 몇 그루가 모여 선 자리까지 또렷했습니다. 순례 씨가 해마다 벌초하러 오르던 바로 그 산이었습니다.
“엄마, 여기서 아버지 계신 산이 보여요.”
순례 씨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베란다 바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창가에 등받이 낮은 나무 의자 하나와 방석이 놓여 있었고, 선반에는 남편이 화물차 앞에서 웃고 있는 사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의자는 뭐냐.” 순례 씨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민석이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엄마 거예요. 엄마 오면 아버지랑 같이 있으라고요. 공장 다니실 땐 여기 앉아 계실 틈도 없으니까, 그만두시면 보여 드리려고 아껴 뒀어요.”
며느리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습니다. “어머님, 그이가 분양 공고 나고 석 달을 주말마다 이 동네를 돌았어요. 지도 앱을 켜 놓고 동마다 방향을 재고, 근처 높은 건물에도 올라가 보고요. 앞동에 가리지 않고 산이 보이는 건 이 동 꼭대기 층뿐이었대요.”
민석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제가 매일 산에 갈 수는 없으니까, 매일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집을 찾은 거예요. 그때 말씀드리면 엄마가 더 우실 것 같아서 못 했어요.”
순례 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습니다. 7년 동안 허세라 여기며 삼켜 온 서운함이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열 해 전 장례식장 마당에서 아들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아이는 그 말을 한 번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몰랐다. 남들한테 보이려고 비싼 데 산 줄만 알았다. 미안하다, 민석아.” 민석은 엄마의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엄마 돈이랑 아버지 돈으로 산 집이잖아요. 아버지 자리는 당연히 있어야죠.”
그날 밤 순례 씨는 나무 의자에 앉아 오래도록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능선 위로 별 하나가 떴습니다. 순례 씨는 호두과자 하나를 사진 앞에 놓으며 속삭였습니다. “여보, 우리 아들이 이렇게 컸어요.”
자식이 내린 결정이 분에 넘쳐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 뒤에 무엇이 있는지 부모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서운한 마음이 들 때는 혼자 판단하고 거리를 두기보다, 한 번쯤 “왜 그랬니” 하고 다정하게 물어보세요.
부모가 건넨 돈은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마음 어딘가에서 다른 모양으로 자라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올가을 순례 씨는 아들 내외와 손녀를 데리고 남편의 산소에 올랐습니다. 단풍 든 참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봉분 위 잔디는 햇볕에 바삭하게 말라 있었습니다. 순례 씨는 고개를 들어 멀리 시내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아파트 숲 가운데 아들네 동 꼭대기 층 창문이 저녁 해를 받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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