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조의금 2000만원 전부 기부했는데..” 5년 뒤 아이들이 차려 준 칠순상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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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남겨진 사람은 그 사람의 흔적을 어떻게 간직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사진을 꺼내 보기도 하고, 유품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떠난 사람이 아끼던 곳에 마음을 남기는 방법을 택하기도 합니다.
대구 수성구에 사는 한정임 씨는 올해 일흔입니다. 남편 이상철 씨는 30년 동안 시내버스 기사로 일했습니다. 정임 씨는 남편이 운전대를 잡는 동안 집 근처 식당에서 일하며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큰아들은 호주에서, 작은아들은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말수가 적었지만 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는 주말마다 동네 지역아동센터에 나가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쳤습니다. 센터 아이들이 견학을 갈 때면 버스 기사 시절 솜씨를 살려 승합차 운전도 도맡았습니다. 아이들은 남편을 “바둑 할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남편은 센터에 다녀온 날이면 저녁 밥상에서 아이들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오늘 민호 녀석이 나를 이겼소. 그놈 머리가 보통이 아니오.” 부모가 맞벌이하거나 할머니 손에 자라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남편은 그 아이들을 친손주처럼 아꼈습니다.
5년 전 겨울,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심근경색이었습니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센터 애들 김장 김치 좀 챙겨 가겠소” 하고 나간 남편이 그날 저녁 영정 사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장례식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버스 회사 동료들과 오랜 단골 승객들, 그리고 센터 아이들과 선생님들까지 줄을 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영정 앞에서 “바둑 할아버지” 하며 엉엉 울었습니다. 정임 씨는 그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아 주며 함께 울었습니다.

장례를 마친 뒤 정임 씨 앞에는 조의금 봉투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모두 합치니 2,000만 원이 넘었습니다. 두 아들은 그 돈으로 어머니 노후에 보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임 씨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 돈은 그이가 아끼던 아이들한테 쓰고 싶다.” 정임 씨는 조의금 전부를 지역아동센터에 기부했습니다. 아이들의 공부방 책상과 겨울 외투, 급식비로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작은아들은 처음에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뜻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친척들 가운데는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혼자 남은 사람이 그 돈을 다 내놓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정임 씨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이가 살아 있었으면 나보다 먼저 그렇게 했을 거예요. 나는 연금이랑 식당 일로 충분히 살아요.”

그 뒤로 정임 씨는 남편 대신 센터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둑은 둘 줄 몰랐지만, 식당에서 30년 동안 익힌 솜씨로 아이들 저녁밥을 지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정임 씨는 장바구니를 들고 센터 부엌에 들어섰습니다.

처음 센터 부엌에 들어선 날, 정임 씨는 싱크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벽에는 남편이 아이들과 바둑을 두며 웃는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정임 씨는 그 사진을 향해 속으로 말했습니다. “여보, 바둑은 못 둬도 밥은 내가 제대로 해 먹일게요.”
아이들은 처음에 낯설어했지만, 금세 정임 씨를 “밥 할머니”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정임 씨가 끓인 된장찌개와 계란말이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반찬이 되었습니다. 시험을 망친 아이가 오면 정임 씨는 말없이 계란말이 한 줄을 더 얹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바둑을 배우던 민호는 고3이 되었습니다. 정임 씨는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남편이 곁에서 함께 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정임 씨는 아이들과 함께 센터 마당에서 김장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고무장갑을 끼고 서툰 손으로 배추에 양념을 발랐고, 정임 씨는 갓 버무린 김치를 돌돌 말아 아이들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남편이 마지막 날 챙기려던 그 김장이었습니다.

올가을, 정임 씨의 칠순이 다가왔습니다. 호주에 사는 큰아들은 오지 못한다고 했고, 정임 씨도 따로 잔치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생일 아침, 정임 씨는 평소처럼 장바구니를 챙겨 센터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센터 문을 여는 순간, 정임 씨는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공부방 한가운데 상이 차려져 있었고, 벽에는 아이들이 직접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우리 밥 할머니 칠순을 축하합니다!] 아이들이 한꺼번에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센터장이 정임 씨의 손을 잡고 웃었습니다. “아이들이 할머니 생신을 어떻게 알았는지 몇 주 전부터 준비하자고 조르더라고요. 졸업한 아이들한테도 다 연락을 돌렸대요.” 그러고 보니 공부방에는 몇 해 전 센터를 떠난 낯익은 얼굴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상 위에는 아이들이 서툴게 끓인 미역국과 삐뚤빼뚤 썬 김밥, 떡과 과일이 놓여 있었습니다. 미역국은 조금 짰고 김밥은 옆구리가 터져 있었지만, 정임 씨에게는 세상 어떤 잔칫상보다 화려해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2주 전부터 몰래 연습했다고 했습니다.

고3 민호가 앞으로 나와 봉투 하나를 건넸습니다. 그 안에는 대학 합격 통지서 사본과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할머니, 저 수시로 대학 붙었어요. 바둑 할아버지가 그러셨어요. 바둑은 한 수 한 수 버티는 거라고. 할머니가 해 주신 밥 먹고 버텼어요.”
뒤이어 대학생이 된 졸업생 수진이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할머니, 저 센터 다닐 때 시험 망치고 울면 할머니가 계란말이 한 줄 더 주셨잖아요. 그게 제일 큰 위로였어요. 저도 사회복지사가 돼서 이 센터로 돌아올 거예요.” 정임 씨는 수진이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센터장은 공부방 벽 한쪽을 가리켰습니다. 그곳에는 작은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상철 할아버지 공부방] 센터장이 말했습니다. “어머님이 기부해 주신 돈으로 이 방을 만들었어요. 그동안 이 방에서 공부한 아이들이 서른 명이 넘습니다.”
그때 공부방 텔레비전 화면에 호주에 사는 큰아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센터 선생님들이 미리 연락해 영상 통화를 연결해 둔 것이었습니다. “엄마, 칠순 축하해요. 아버지가 보셨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거예요.” 정임 씨는 미역국 숟가락을 든 채 아이들 사이에서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날 정임 씨는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짠 미역국과 터진 김밥을 끝까지 다 먹었습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너무 짜죠?” 하고 묻자 정임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다, 내 평생 먹은 미역국 중에 제일 맛있다.” 정임 씨는 웃으며 그 아이 그릇에 김밥 한 줄을 더 얹어 주었습니다.
권정생 선생의 『몽실 언니』에서 몽실이는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들을 끝까지 품고 돌봅니다.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품는 마음은 결국 가장 따뜻한 가족을 만들어 냅니다.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끼던 것을 함께 아껴 주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눈 마음은 시간이 흘러 가장 따뜻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정을 나누어 보세요.
올가을 정임 씨는 작은아들과 함께 수성못 둘레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못 위로 붉은 노을이 번졌고, 물가 나무마다 노란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정임 씨는 아들의 팔짱을 끼고 해가 질 때까지 물가를 걸었습니다.
출처 : ‘몽실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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