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붓딸 대학 등록금 3000만원 내줬는데..” 결혼식장에서 처음 들은 한마디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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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를 내 자식처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외롭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그 아이에게 나는 끝내 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묵묵히 건넨 사랑은 언젠가 그 아이의 마음에 닿습니다.
전북 전주에 사는 정미경 씨는 올해 예순여섯입니다. 25년 동안 중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사로 일했습니다. 새벽 여섯 시면 급식실에 나가 수백 명 분의 밥과 국을 끓였고, 손목과 어깨에는 늘 파스가 붙어 있었습니다.
미경 씨는 마흔여섯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김 씨와 결혼했습니다. 김 씨에게는 열두 살 난 딸 수진이가 있었습니다. 결혼식 날 수진이는 미경 씨와 눈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수진이는 미경 씨를 끝내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학교 친구들 앞에서는 “우리 집 아줌마”라고 불렀고, 집에서는 아예 부르지 않았습니다. 미경 씨가 차려 준 밥상에 앉아도 수진이는 말 한마디 없이 밥만 먹고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미경 씨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수진이 소풍날이면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쌌고, 학부모 상담 날이면 급식실에 양해를 구하고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어머님” 하고 부르면 미경 씨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에는 수진이가 방문을 쾅 닫으며 소리친 날도 있었습니다. “엄마도 아니면서 왜 자꾸 참견해요!” 미경 씨는 그날 밤 부엌에 혼자 앉아 소리 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수진이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도시락에 담았습니다.
수진이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 생리통으로 학교에서 조퇴한 날이 있었습니다. 미경 씨는 일을 마치자마자 약국에 들러 진통제와 핫팩을 사 들고 왔습니다. 수진이는 고맙다는 말 대신 등을 돌리고 누웠지만, 다음 날 아침 식탁에는 핫팩 포장지가 가지런히 접혀 있었습니다.

수진이는 공부를 잘해서 서울의 한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남편이 하던 작은 인쇄소가 거래처 부도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딸의 첫 등록금 고지서를 들고 밤새 담배만 피웠습니다.
미경 씨는 급식실에서 일하며 모아 둔 적금을 깼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수진이한테는 당신이 마련했다고 해요. 내가 냈다고 하면 그 애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예요.”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4년 동안 미경 씨가 낸 등록금과 기숙사비는 3,000만 원이 넘었습니다. 미경 씨는 그사이 새 옷 한 벌 사지 않았고, 아픈 손목도 병원 대신 파스로 버텼습니다. 수진이는 방학에 내려와도 아빠와만 이야기를 나누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수진이의 대학 졸업식 날, 미경 씨는 일부러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수진이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곤란해할까 봐서였습니다. 남편이 보내온 졸업 사진 속 학사모를 쓴 수진이를, 미경 씨는 급식실 휴게실에서 몇 번이고 확대해 보았습니다.

수진이가 서울에서 직장을 잡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남편이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미경 씨는 1년 넘게 남편 곁을 지키며 병간호를 했습니다. 남편은 6년 전 봄, 미경 씨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수진이는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그 뒤로 연락은 명절 안부 문자 한 통이 전부였습니다. 미경 씨는 남편이 떠났으니 이제 그 아이와 나를 이어 줄 끈도 끊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섭섭했지만 그것이 맞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남편이 떠난 집은 유난히 넓고 조용했습니다. 미경 씨는 급식실 일을 그만두고 연금으로 혼자 지냈습니다. 저녁이면 남편 사진 옆에 수진이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나란히 세워 두고 “둘 다 잘 지내라” 하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올봄, 수진이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습니다. “아줌마, 저 가을에 결혼해요. 꼭 와 주세요.” 미경 씨는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와 달라는 말만으로도 고마웠습니다.

결혼식 날, 미경 씨는 가장 아끼던 한복을 꺼내 입었습니다. 그리고 하객석 맨 뒷줄에 조용히 앉았습니다. 혼주석은 친정 쪽 이모나 고모가 앉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식장 직원이 다가와 미경 씨를 찾았습니다. “신부 어머님, 앞자리로 오셔야 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혼주석에 앉은 미경 씨 앞에 신부 입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혼자 걸어 들어온 수진이는 단상 앞에 서서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았습니다. 그리고 하객들을 향해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빠 수첩을 봤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수진이 등록금은 전부 미경 씨가 냈다. 언젠가 수진이에게 꼭 말해 줘야 하는데.’ 저는 그 수첩을 들고 6년 동안 이 말을 할 용기를 모았습니다.”

수진이는 혼주석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그동안 한 번도 못 불러서 미안해요. 엄마 덕분에 대학 다녔고, 엄마 덕분에 오늘 여기 서 있어요. 엄마, 사랑해요.” 식장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미경 씨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20년 동안 기다린 한마디였습니다. 수진이는 단상에서 내려와 미경 씨를 끌어안았고, 하객들 사이에서도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신랑도 다가와 미경 씨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장모님, 수진이가 늘 말했어요. 자기한테는 엄마가 한 분 계신데 아직 불러 드리지 못했다고요. 이제 제가 아들 노릇 하겠습니다.” 미경 씨는 사위의 손을 잡고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식이 끝나고 수진이는 미경 씨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습니다. 그 안에는 손목 보호대와 함께 쪽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 손목, 이제 제가 챙길게요. 신혼여행 다녀와서 병원 같이 가요.] 미경 씨는 그 쪽지를 지갑 깊숙이 넣었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수진이 부부는 그 주말 곧장 전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미경 씨의 손을 잡고 정형외과에 함께 갔습니다.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던 수진이는 간호사에게 “저희 엄마예요”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병원에서 나온 세 사람은 남부시장 골목의 오래된 국밥집에 들어갔습니다. 뚝배기에 담긴 콩나물국밥 세 그릇과 깍두기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이었습니다. 수진이가 수란을 미경 씨 그릇에 덜어 주며 말했습니다. “엄마, 많이 드세요.” 미경 씨는 그 말이 들릴 때마다 또 눈가가 젖었습니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공녀』에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세라는 차가운 다락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말없이 마음을 써 준 사람들의 온기가 결국 세라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아이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건넨 정성은 사라지지 않고 그 아이 안에 고스란히 쌓입니다. 오늘 가까이 있는 누군가에게, 대답이 늦더라도 변함없는 마음을 건네 보세요.
올가을 미경 씨는 수진이 부부와 함께 덕진공원 연못가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연못을 둘러싼 나무마다 단풍이 곱게 물들었고, 물 위로 저녁 햇살이 금빛으로 흔들렸습니다. 미경 씨는 딸의 팔짱을 끼고 해가 질 때까지 연못가를 걸었습니다.
출처 :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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