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형제 교복값 700만원 보탰는데..” 12년 뒤 아내가 남긴 누런 봉투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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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돕는 일인데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숨기게 될 때가 있습니다. 살림 걱정을 보탤까 봐, 오지랖이 넓다는 핀잔을 들을까 봐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십 년을 한 지붕 아래 산 부부 사이에 정말로 감춰지는 일은 생각만큼 많지 않습니다.
경상도 바닷가 소도시에 사는 서 씨는 올해 예순여덟입니다. 스물여덟 해째 개인택시를 몰고 있고, 지금도 새벽 다섯 시면 골목에 세워 둔 차에 시동을 겁니다. 아내와 함께 남매를 키워 서울로 장가보내고 시집보낸 뒤, 오래된 단층집에서 단둘이 살았습니다. 그 아내가 지난봄 심장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열두 해 전 봄,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에 할머니와 중학생 형제가 이사를 왔습니다. 형제의 아버지는 배를 타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고 했습니다. 일흔을 넘긴 윤 씨 할머니가 시장 어귀에 좌판을 펴고 나물을 팔아 두 손자를 먹여 살렸습니다.
서 씨가 형제를 처음 눈여겨본 것은 그해 늦가을 새벽이었습니다. 차를 빼러 나가 보니 큰애가 얇은 체육복 차림으로 신문 뭉치를 자전거에 싣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차 나가시게 금방 비킬게요.” 핸들을 쥔 손등이 빨갛게 터져 있었습니다. 서 씨는 차에 두었던 목장갑 두 켤레를 꺼내 아이 주머니에 말없이 찔러 넣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오후에는 정류장에서 우산도 없이 떨고 있는 작은애를 보았습니다. 서 씨가 차를 세우자 아이는 머뭇거렸습니다. “아저씨, 저 택시비 없는데요.” 서 씨는 미터기를 끈 채 뒷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 차는 오늘 옆집 사람만 태운다. 얼른 타라.”
그해 섣달, 서 씨는 옆집 대문 앞에서 눈가를 훔치는 윤 씨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형제는 한 해 사이 키가 훌쩍 자라 교복 바지가 발목 위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새 학년이 되기 전에 두 벌을 새로 맞춰야 했습니다. “두 벌이면 오십만 원이 넘는다는데, 나물 팔아서는 어림도 없어요.”
그날 밤 서 씨는 다용도실 쌀독 앞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항아리를 기울이면 바닥 밑에 비닐로 싼 봉투 하나가 깔려 있었습니다. 현금 내는 손님 요금에서 하루 만 원, 이만 원씩 떼어 몇 해 동안 모은 비상금이었습니다. 아내 칠순에 금반지 하나 해 주려고 아껴 두던 돈이었습니다.
이튿날 서 씨는 할머니 손에 봉투를 쥐여 주며 말했습니다. “빌려드리는 겁니다. 애들 다 커서 돈 벌면 그때 받지요.” 할머니는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습니다. 서 씨는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계부에 콩나물값까지 적는 사람인데, 서울 사는 우리 애들 집 장만도 제대로 못 도와줬다며 서운해할 것 같았습니다.
그 뒤로 쌀독 밑 봉투는 몇 해에 걸쳐 조금씩 옆집으로 건너갔습니다. 큰애가 수학여행비가 없어 안 가겠다고 버틴다는 말을 듣고 한 번, 급식비가 석 달 밀려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는 말을 듣고 또 한 번 꺼냈습니다. 큰애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새 교복값을 다시 보탰습니다. 그렇게 나간 돈이 모두 700만 원이었습니다.
이상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번에 꺼내면 바닥이 나겠다 싶었는데, 봉투를 열어 보면 생각보다 돈이 남아 있곤 했습니다. 서 씨는 늙어서 셈이 흐려졌나 보다 하고 웃어넘겼습니다.
세월이 흘러 윤 씨 할머니는 여섯 해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애는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조선소 용접공이 되었고, 작은애는 대학을 마치고 다른 도시에 취직했습니다. 둘 다 바빠지면서 연락은 명절 문자 한 통으로 줄었습니다. 서 씨가 서운한 내색을 하면 아내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 살기 바빠서 그래요. 잘 사는 게 갚는 거지요.”
아내를 보내고 맞은 첫 겨울이었습니다. 11월 마지막 토요일, 서 씨는 택시를 쉬고 혼자 김장을 하기로 했습니다. 해마다 아내 옆에서 배추만 날랐던 터라 절인 배추 열 포기가 산더미처럼 보였습니다. 마당에는 찬 바닷바람이 불었고, 고무 대야에 받아 둔 물 위로 살얼음이 끼어 있었습니다.
양념을 버무릴 자리를 내려고 다용도실 쌀독을 끌어당기던 참이었습니다. 쌀이 반쯤 남은 항아리가 기우뚱하면서 바닥 밑에 깔린 자기 비상금 봉투가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처음 보는 누런 봉투가 하나 더 깔려 있었습니다. 겉봉에는 반듯반듯한 아내 글씨로 ‘여보에게’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봉투 안에는 5만 원권 몇 장과 접힌 쪽지, 그리고 손때 묻은 얇은 공책 한 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서 씨는 고무장갑을 벗고 쪽지부터 펼쳤습니다. ‘모자라면 여기서 더 쓰세요. 당신이 그 애들 챙기는 거 나는 자랑스러워요.’
공책을 넘기자 날짜와 반찬 이름이 빼곡했습니다. ‘3월 4일, 멸치볶음과 계란말이. 큰애 시험 기간.’ ‘10월 17일, 뭇국 한 통. 작은애 감기.’ 열두 해 동안 아내는 밤마다 옆집 문고리에 반찬 봉지를 걸어 두고, 그날 무엇을 걸었는지 적어 두었던 것입니다. 맨 뒷장에는 따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봄, 쌀독 봉투에 30만 원 채움. 큰애 수학여행 간다고 함.’
서 씨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저녁마다 “반찬이 또 남았네, 내가 손이 커서 탈이에요” 하던 아내의 혼잣말도,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던 봉투도 모두 아내가 한 일이었습니다. 아내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습니다. 작업복 차림의 큰애가 고무장갑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아저씨, 해마다 김장 날이면 아주머니가 저 불러서 배추 나르게 하셨잖아요. 올해는 부르실 분이 안 계셔서 제가 먼저 왔습니다.”
서 씨가 말없이 공책을 내밀자 큰애는 한 장 한 장 넘기다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문고리 반찬, 아주머니가 거신 거 저희 다 알았어요. 아저씨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저씨가 쑥스러워하신다고요. 작은애도 다음 주에 내려온대요.”
서 씨는 젖은 마당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혼자 한 일이라고 믿었던 열두 해가 사실은 아내와 둘이 한 일이었습니다. 눈물이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고, 큰애는 서 씨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습니다. 그날 두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배추에 속을 넣었습니다.
부부는 서로 모르는 줄 알고 살지만, 실은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입니다. 좋은 일을 숨긴 쪽도, 알면서 모른 척 보태 준 쪽도 결국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일 하나쯤은 털어놓아 보세요. 칭찬을 바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도 함께 기뻐할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오늘 저녁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꼭 건네세요.
지난 일요일, 서 씨는 형제를 택시에 태우고 아내가 잠든 바닷가 언덕의 공원묘지에 다녀왔습니다. 작은애가 갓 담근 김치 한 통을 묘 앞에 내려놓았고, 큰애는 아주머니가 좋아하던 노란 국화를 꽂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초겨울 바다 위로 붉은 노을이 길게 번졌습니다. 서 씨는 미터기를 끈 채 해안도로를 천천히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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