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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돈 항암비 2천만원 몰래 내줬는데..” 5년 뒤 누가 두고 간 보온병에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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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돈은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사이입니다. 서로 아끼는 마음이 있어도 선뜻 손을 내밀기 조심스럽고, 받는 쪽은 그보다 더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어떤 도움은 이름을 지우고 건네야 온전히 전해지기도 합니다.

서울 변두리 동네에 사는 권 씨는 올해 예순넷입니다. 시장 골목 끝에서 31년째 작은 미용실을 하고 있습니다. 의자 세 개짜리 가게지만 아침 아홉 시면 어김없이 셔터를 올리고, 동네 할머니들 뽀글이 파마부터 학생들 앞머리까지 손수 만집니다. 버스 회사에서 정년퇴직한 남편과 단둘이 살고, 외아들은 결혼해 며느리와 손녀 하나를 두었습니다.

안사돈은 며느리의 친정어머니입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식당 주방 일을 하며 외동딸을 키웠습니다. 상견례 날 안사돈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 해 드릴 게 없습니다. 딸 하나 잘 키운 것밖에는요.” 권 씨는 안사돈의 거친 손을 잡았습니다. “그거면 됐지요. 그게 제일 큰 혼수예요.”

결혼식 전날, 권 씨는 안사돈을 미용실로 불러 머리를 해 주었습니다. 안사돈은 한사코 돈을 내겠다고 했지만 권 씨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해마다 여름이면 미용실 앞에 열무김치 한 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뚜껑에는 ‘사돈, 입맛 없을 때 드세요’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말수 적은 안사돈다운 인사였습니다.

5년 전 봄, 며느리가 손녀를 안고 와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수술은 무사히 받았지만 재발을 막으려면 건강보험이 되지 않는 항암제를 써야 하는데, 그 약값만 2천만 원 가까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치료 안 받겠대요. 딸한테 짐 되기 싫다고요.”

그날 밤 권 씨는 장롱 깊숙이 넣어 둔 통장을 꺼냈습니다. 파마 손님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떼어 부어 온 적금이었습니다. 칠순에 남편과 제주도에 가려고 모아 둔 돈이었습니다.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 며느리한테는 말하고 줘야 하지 않겠소?” 권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알면 사돈이 안 받아요. 받더라도 평생 고개 못 들고 살 거고요. 누가 냈는지 모르는 게 서로 편해요.”

이튿날 권 씨는 가게 문에 ‘오전 휴업’이라고 써 붙이고 대학병원 원무과로 갔습니다. 안사돈 이름으로 치료비 2천만 원을 미리 수납하고 직원에게 거듭 부탁했습니다. “누가 냈느냐고 물으면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만 해 주세요.” 수납 창구에 카드를 내밀던 권 씨의 손끝에는 전날 손님 머리에 바른 염색약 물이 검게 배어 있었습니다.

안사돈은 치료를 무사히 마쳤고, 올봄 5년째 정기 검사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며느리는 “어디서 후원이 들어왔었대요. 하늘이 도왔나 봐요” 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권 씨는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 안사돈은 권 씨를 자꾸 피하는 듯했습니다. 명절에 만나도 눈을 잘 맞추지 않았고, 손녀 생일에도 얼굴만 비치고 서둘러 일어났습니다. 며느리 말로는 식당 일을 그만두고 매일 새벽 어딘가에 나간다고 했습니다. 권 씨는 혹시 자신이 서운하게 한 일이 있었나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사이 권 씨의 허리는 점점 나빠졌습니다. 30년 넘게 서서 손님 머리를 만진 탓이었습니다. 다리가 저려 가위를 쥔 채 주저앉는 날이 늘었고, 결국 척추관협착증으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의사가 소개해 준 곳은 5년 전 안사돈이 치료받았던 바로 그 대학병원이었습니다.

시월 초,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권 씨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6인실 창가 자리에서 마취가 풀리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습니다. 남편은 밤늦게 집으로 돌려보냈고, 아들 내외는 주말에나 올 수 있었습니다. 권 씨는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침대 옆 탁자 위에 낯선 보온병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뚜껑을 여니 따뜻한 김이 올라왔습니다. 곱게 쑨 흰죽이었습니다. 보온병 아래에는 접힌 종이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사돈, 이번엔 제 차례예요.’

권 씨는 그 글씨를 알아보았습니다. 해마다 열무김치 통 뚜껑에 붙어 있던 바로 그 글씨였습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보온병은 어김없이 놓여 있었습니다. 호박죽, 팥죽, 들깨죽이 차례로 바뀌었습니다. 간호사에게 묻자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 노란 조끼 봉사자님이요. 5년째 매일 아침 오세요. 보호자 없는 어르신들 씻겨 드리고 밥도 떠 드리고요. 하루도 빠진 적이 없으세요.”

나흘째 새벽, 권 씨는 일부러 잠들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여섯 시가 조금 넘자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습니다. 노란 조끼를 입은 안사돈이 보온병을 품에 안고 들어왔습니다. 얼굴에는 예전에 없던 혈색이 돌았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안사돈은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사돈, 다 알고 계셨어요?” 권 씨가 먼저 물었습니다. 안사돈은 침대 곁에 앉아 권 씨의 손을 가만히 잡았습니다. “원무과에 갔더니 벌써 수납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몇 번을 물었더니 직원이 그러대요. 손끝에 염색약 물이 든 아주머니가 다녀갔다고요.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이 내 주변에 누가 있겠어요.”

안사돈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돈으로는 평생 일해도 못 갚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 병원 봉사를 시작했어요. 사람 일은 모르니까, 언젠가 사돈이 아파서 여기 오시면 그때는 내가 곁에 있어야지 싶었어요. 매일 아침 병실 문 앞 이름표를 하나하나 봤어요. 사돈 이름이 없으면 다행이다 하면서도, 다음 날 또 왔고요.” 그동안 눈을 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끝까지 모른 척해 준 사돈의 마음을 허물어 버릴 것 같아서였습니다.

권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안사돈의 손을 끌어안았습니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습니다. 5년 동안 서운하다고만 여겼던 그 눈길이, 사실은 매일 새벽 자신을 기다려 온 마음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병실에 온 며느리는 두 어머니가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모든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두 사람의 손 위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퇴원하는 날까지 안사돈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을 쑤어 왔고, 복도 걷기 연습을 할 때면 권 씨의 팔을 붙잡고 한 걸음씩 함께 걸었습니다. 퇴원하고 보름 뒤 권 씨는 다시 미용실 문을 열었습니다. 첫 손님은 안사돈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권 씨는 돈을 받지 않았고, 안사돈은 다음 날 동치미 한 통을 들고 왔습니다.

옛 역사책 『춘추좌씨전』에는 결초보은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딸의 목숨을 살려 준 은혜를 잊지 않은 노인이, 죽은 뒤에도 풀을 엮어 은인의 적을 넘어뜨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를 갚는 길은 꼭 같은 모양이 아니어도 됩니다.

이름 없이 건넨 도움은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 줍니다. 그 마음을 받은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의 시간을 들여 답합니다. 돈은 금세 쓰이고 사라지지만, 그 돈에 담긴 마음은 오래 남아 언젠가 다시 돌아옵니다.

이번 늦가을 권 씨와 안사돈은 동네 하천 산책로를 나란히 걸었습니다. 마른 억새가 바람에 사각거렸고, 물 위로 오후 햇살이 잘게 부서졌습니다. 권 씨가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안사돈은 말없이 팔을 내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다리 난간에 기대어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오래도록 물길을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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