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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 보일러값 700만원 대줬는데..” 9년 뒤 아내가 내민 통장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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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 처가에 쓰는 돈은 어쩐지 조심스럽습니다. 아내에게 말하면 생색 같고, 내 형제들 귀에 들어가면 뒷말이 날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많은 남편이 처가에 건넨 정성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에만 묻어 둡니다.

최 씨는 올해 예순아홉입니다. 충청도의 한 소도시에서 스물두 해 동안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다 지난해 정년퇴직했습니다. 그 전에는 섬유 공장에서 기계를 돌렸는데, 마흔일곱에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경비복을 입었습니다. 동갑내기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두었고, 둘 다 결혼해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처가는 전라도 산골 마을에 있었습니다. 처음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갔던 날, 장인은 공장 다니는 사위가 미덥지 않다며 돌아앉았습니다. 그때 장모가 씨암탉을 잡아 내오며 말했습니다. “손이 거친 사람은 거짓말을 안 하는 법이요.”

최 씨는 그 말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장인이 세상을 떠난 뒤 장모가 혼자 고추 농사를 짓자, 해마다 여름휴가를 내 고추를 따러 내려갔습니다. 장모는 사위 몫 고춧가루를 따로 빻아 두었다가 차 트렁크에 실어 주었습니다. 공장이 문을 닫아 넉 달을 놀던 해에는 아무 말 없이 쌀 두 가마를 보내왔습니다.

9년 전 설, 처가에 내려간 최 씨는 안방 문을 열자마자 걸음을 멈췄습니다. 방 안에 입김이 하얗게 서렸습니다. 이십 년 넘은 기름보일러가 가을부터 고장 나, 장모는 전기장판 한 장으로 겨울을 버티고 있었습니다. 허리가 아파 바닥에서 일어날 때마다 벽을 짚고 한참을 끙끙댔습니다.

이튿날 최 씨는 읍내 보일러 가게 정 씨를 불렀습니다. 정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건 고쳐 쓸 물건이 아니에요. 새로 놓고 배관까지 손보려면 400만 원은 드실 겁니다.” 최 씨는 내친김에 장모가 누웠다 일어나기 편한 돌침대까지 알아보았습니다. 모두 합하니 700만 원이었습니다.

최 씨에게는 아내도 모르는 통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몇 해째 야간수당을 따로 모아 온 통장이었습니다. 500만 원 남짓 들어 있었고, 모자란 돈은 동료들의 야간 근무를 석 달 동안 대신 서서 채웠습니다.

공사가 끝나던 날, 최 씨는 따뜻해진 안방에서 장모의 손을 잡았습니다. “장모님, 제가 했다고 하지 마시고 그 사람이 보낸 걸로 해 주세요.” 장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자네 고생해서 번 돈을 내가 어찌 받는가.” “제가 했다고 하면 다들 마음이 불편해요. 딸이 해 드린 걸로 하셔야 편히 주무시죠.” 장모는 한참 사위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뒤로 장모는 전화할 때마다 딸에게 “네가 놔 준 침대 덕에 허리가 다 나았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엄마 편하면 됐어” 하고 웃기만 했습니다. 최 씨는 아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겼고, 명절마다 장모 손에 따로 봉투를 쥐여 드렸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최 씨는 마음이 쓰였습니다. 장모는 해마다 야위어 갔고, 늘 같은 몸빼에 같은 털조끼 차림이었습니다. 용돈이 모자라 저러시나 싶어 봉투를 조금씩 두툼하게 했습니다. 어느 추석에는 처남이 술기운에 “매형은 처가 일에 통 관심이 없으시죠” 했습니다. 최 씨는 웃어넘겼지만 그날 밤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올가을, 장모는 아흔둘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닷새 뒤, 최 씨 부부는 시골집 안방을 정리하러 내려갔습니다. 아침부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마당 감나무에는 아무도 따지 않은 감이 붉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안방에는 9년 전 최 씨가 놓아 드린 돌침대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요를 개던 아내가 매트 귀퉁이를 들추더니 손을 멈췄습니다. 그 밑에 누런 비닐봉지 하나가 납작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아내는 봉지 안을 들여다보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말없이 봉지 속 통장과 쪽지를 꺼내 남편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통장 겉에는 장모의 삐뚤삐뚤한 글씨로 ‘사위 몫’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설과 추석이 지난 날짜마다 20만 원, 30만 원씩 입금 기록이 찍혀 있었습니다. 9년 동안 사위가 쥐여 드린 용돈이 한 번도 빠짐없이 들어 있었고, 다달이 몇만 원씩 보탠 기록도 이어졌습니다. 잔액은 900만 원이 넘었습니다.

쪽지에는 연필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사위가 해 준 침대에서 9년을 따뜻하게 잤다. 겨울이 하나도 안 무서웠다. 이 돈은 사위한테 돌려줘라.]

최 씨의 손이 떨렸습니다. “장모님이 이걸 한 푼도 안 쓰셨어. 나는 용돈이 모자라서 그렇게 사시는 줄 알고….” 그때 아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 나 처음부터 알았어요.”

최 씨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내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말을 이었습니다. “그해 정월에 엄마가 다 말씀하셨어요. 보일러 아저씨가 사위가 계산했다고 하더라고. 우리 사위 마음 다치게 하지 말고 모른 척하라고 하셨어요.”

“그럼 왜 9년 동안 말을 안 했어?”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당신이 처가 일로 생색낸다는 소리 들을까 봐요. 동생이 당신더러 무심하다고 했을 때도 다 말해 버리고 싶었어요.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 숨기고 싶어 하는데 내가 어떻게 말해요.”

최 씨는 통장을 쥔 채 돌침대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습니다. 장모는 사위의 비밀을 지켜 주었고, 아내는 남편의 비밀을 지켜 주었습니다. 빗소리 속에서 부부는 한참 동안 서로의 손을 놓지 못했습니다.

최 씨는 통장의 돈을 찾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돌침대를 트럭에 실어 와 집 안방에 놓았습니다. “장모님이 9년 데우신 침대니까 이제 당신이 누워. 당신도 9년 동안 혼자 속 끓였잖아.” 아내는 웃으며 남편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오 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 속 가난한 부부는 서로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려고 아내는 머리카락을, 남편은 시계를 몰래 팝니다. 선물은 쓸모를 잃었지만, 서로를 위해 가장 아끼는 것을 내놓은 마음만은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가족끼리 숨기는 일이 언제나 거짓은 아닙니다. 때로는 상대의 체면과 마음을 지켜 주려는 침묵이 가장 깊은 사랑이 됩니다. 오늘 곁에 있는 사람이 나를 위해 말없이 덮어 준 일은 없는지 한 번쯤 돌아보세요.

첫서리가 내린 아침, 최 씨 부부는 다시 시골집을 찾았습니다. 장모 산소 옆 비탈에는 마른 억새가 하얗게 흔들렸고, 감나무 꼭대기에는 까치밥 몇 알이 붉게 남아 있었습니다. 부부는 장모가 앉던 마루에 나란히 앉아 아랫마을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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