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생 장가갈 때 이바지 해줬는데..” 8년 뒤 사돈댁이 보낸 음식 상자에 손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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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는 만든 사람의 시간이 담깁니다. 밤새 불 앞에 서서 부친 전 한 장과 손목이 시리도록 버무린 나물 한 접시에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성이 남의 이름표를 달고 팔려 나가는 것을 보게 되면, 서운함은 배신감으로 바뀝니다.
충청도의 한 작은 도시에 사는 한 씨는 올해 예순넷입니다. 시장 골목 안쪽에서 30년째 반찬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새벽 다섯 시면 가게 불을 켜고 콩자반을 조리고 깻잎을 재웁니다. 남편은 장을 봐 오고 배달을 맡습니다. 늦게 얻은 외동딸은 서른하나로, 올가을 회사 동료와 결혼했습니다.
한 씨가 스물넷에 시집왔을 때 막내 시동생은 열네 살 중학생이었습니다. 시아버지는 그 이듬해 경운기 사고로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도 3년 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둘째 시동생과 시누이는 일찍 객지로 나갔고, 막내를 거둘 사람은 맏이인 남편과 한 씨뿐이었습니다.
한 씨는 시동생의 도시락을 3년 동안 쌌습니다. 반찬 투정을 하면 다음 날 소시지 부침을 하나 더 얹어 주었습니다. 시동생이 군대에 갔을 때는 면회 날마다 닭볶음탕을 싸 들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탔습니다. 시동생은 면회실에서 밥을 먹다 말고 말했습니다. “형수, 나는 엄마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요. 형수 반찬 맛만 기억나요.”
시동생은 혼자 오래 지냈습니다. 마흔여섯이 되던 해, 장가를 가겠다며 동서 될 사람을 데려오자 한 씨는 남편보다 먼저 울었습니다. “늦게 가는 장가인데 사돈댁에 기죽으면 안 되지. 이바지는 내가 할게요.”
한 씨는 가게 셔터에 ‘사흘 쉽니다’라고 써 붙였습니다. 작은 반찬가게에 사흘 장사를 접는 것은 적지 않은 손해였지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단골 정육점에서 갈비를 떼어 와 핏물을 빼고, 사흘 밤을 거의 새우며 열두 가지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갈비찜과 육전, 동태전, 꼬치전으로 시작해 인절미와 약식, 구절판을 차렸고, 마지막으로 잣을 박은 폐백 대추를 실에 꿰었습니다. 대추를 다 꿰었을 때는 손끝이 갈라져 반창고를 감고 있었습니다.
이바지 상이 사돈댁에 도착한 날, 동서는 상 앞에서 휴대전화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습니다. “형님, 이건 평생 간직할래요.”
결혼 뒤에도 한 씨는 매주 목요일이면 밑반찬을 통에 담아 시동생 집에 보냈습니다. 그렇게 8년이 흘렀습니다. 동서는 반찬을 받을 때마다 사진을 찍었고, 어느 날은 간을 어떻게 맞추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씨는 가게 문을 닫은 저녁마다 공책에 적었습니다. 멸치볶음은 간장 한 숟가락에 조청 반 숟가락, 장조림은 간장과 물을 1대 3으로. 공책 한 권이 다 차자 한 씨는 그것을 동서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이건 우리 집 맛이니까 동서가 이어 가요.”
몇 해 전부터 동서는 부쩍 바빠졌습니다. 작은 일을 시작했다고만 할 뿐 무슨 일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명절에도 늦게 왔다가 일찍 돌아갔습니다. 한 씨는 서운했지만 먹고사는 일이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시월 첫째 토요일, 외동딸의 결혼식 날이 왔습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한 씨는 식장 입구에서 하객을 맞으며 자꾸 계단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일주일 전 동서가 전화로 한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려 있었습니다. “형님, 죄송해요. 그날 꼭 빠질 수 없는 일이 있어서요.”
시동생은 혼자 왔습니다. 두툼한 봉투를 내밀면서도 한 씨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형수, 미안해요. 집사람이 일이 좀….” 한 씨는 봉투를 받아 들고 웃었습니다. “괜찮아요. 삼촌이라도 와 줬으니 됐어요.”
피로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거실에 사돈댁이 보낸 음식 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답례 음식이었습니다. 보자기를 풀자 반질반질한 검은 찬합이 드러났습니다. 뚜껑에는 금색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께 물려받은 손맛.’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이바지 업체 이름이 적혀 있었고, 옆에 찍힌 전화번호는 낯익은 번호였습니다. 동서의 번호였습니다.
뚜껑을 여는 한 씨의 손이 떨렸습니다. 윤기 흐르는 갈비찜, 노릇한 육전과 동태전, 색을 맞춰 꽂은 꼬치전, 콩고물을 묻힌 인절미, 칸칸이 채운 구절판, 그리고 잣을 박아 실에 꿴 폐백 대추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씩 세어 보니 열두 가지였습니다. 8년 전 사흘 밤을 새워 차린 그 상과 가짓수도, 담은 순서도 똑같았습니다.
옆에서 딸이 휴대전화로 업체 이름을 찾아보다가 얼굴이 굳었습니다. “엄마, 이거 좀 봐.” 업체 누리집 맨 위의 대표 사진은 8년 전 사돈댁에 보낸 바로 그 이바지 상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시어머니께서 평생 지켜 오신 비법 양념’이라는 문구와 함께, 한 씨가 공책에 적어 준 장조림 비율이 그대로 실려 있었습니다. 상품 사진 속 멸치볶음과 깻잎장아찌는 한 씨 가게의 반찬통에 담겨 있었습니다.
한 씨는 소파에 주저앉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동서가 시집오기 스무 해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서는 시어머니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한 씨는 동서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동서의 목소리는 뜻밖에 담담했습니다. “형님, 그날은 그 댁에 납품이 있어서 못 갔어요. 큰 주문이라 빠질 수가 없었어요.” 한 씨는 목소리를 누르며 물었습니다. “동서가 언제 어머님 음식을 먹어 봤어요? 그 사진은 내가 동서 결혼 때 차린 상이잖아요.” 잠시 말이 없던 동서가 대답했습니다. “어차피 집안 음식인데, 형님 거 내 거가 어디 있어요.”
한 씨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가게를 하면서 남의 반찬을 내 것이라고 말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주 일요일, 한 씨는 시동생 부부를 가게로 불렀습니다. 셔터를 반쯤 내린 가게 안, 조리대 위에 공책 한 권과 출력한 누리집 화면을 올려놓았습니다. “동서, 손맛은 얼마든지 나눠 줄 수 있어요. 공책 준 것도 후회 안 해요. 그런데 돌아가신 어머님 이름을 팔고, 내가 밤새 만든 상을 동서 솜씨처럼 걸어 두는 건 안 돼요. 그건 집안 음식이 아니라 거짓말이에요.”
한 씨는 차분하게 정리했습니다. 일주일 안에 대표 사진과 반찬 사진을 모두 내리고 ‘시어머니께 물려받은’이라는 문구를 지울 것, 매주 보내던 밑반찬은 오늘로 끝낸다는 것, 그리고 사돈댁에는 동서가 직접 사정을 밝히고 사과할 것이었습니다.
시동생이 먼저 고개를 숙였습니다. “형수, 저는 정말 몰랐어요. 알았으면 말렸을 거예요. 형수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데….” 동서는 한참 입술을 깨물다가 작게 말했습니다. “장사가 안돼서 그랬어요. 제 손으로 만든 건 아무도 안 봐 줬어요.” 한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동서 손으로 다시 해 봐요. 내 이름도, 어머님 이름도 말고.”
열흘 뒤 누리집 사진이 바뀌었습니다. 동서가 직접 부친 전과 조금 서툴게 꿴 대추 사진이 올라왔고, 문구는 ‘제 손으로 정성껏 만듭니다’로 고쳐졌습니다. 사돈댁에서도 전화가 왔습니다. 사돈어른은 “덕분에 진짜 손맛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됐습니다” 하며 웃었습니다.
정성은 아낌없이 나눌수록 귀합니다. 그러나 그 정성에 붙은 이름까지 내어 줄 필요는 없습니다. 비법을 가르쳐 주는 일과 내 수고를 남의 간판으로 쓰게 내버려 두는 일은 다릅니다.
서운한 일이 생기면 참고 넘기기보다 무엇이 안 되는지 분명하게 말해 주세요. 그래야 정이 상하지 않고 오래 이어집니다.
김장철을 앞둔 십일월, 한 씨는 가게 앞에 배추를 산더미처럼 부려 놓고 소금을 쳤습니다. 시장 골목 위로 낮게 들어온 햇살이 절인 배춧잎을 투명하게 비추었습니다. 옆 가게 박 씨가 “올해도 한 씨네 김치가 제일 먼저 나오겠네” 하며 지나갔습니다. 한 씨는 고무장갑 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다시 배추를 한 포기씩 뒤집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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