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조카 전세대출에 1억 보증 서줬는데..” 2년 뒤 설날 형수가 한 말에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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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남은 형제는 그 집 자식들을 제 자식처럼 챙기게 됩니다. 핏줄이니 서류에 이름 하나 올려 주는 일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증이라는 두 글자는 정만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충청도 한 읍내에 사는 조 씨는 올해 예순일곱입니다. 장터 골목 어귀에서 40년째 철물점을 하고 있습니다. 수도꼭지 하나를 사러 온 손님에게도 직접 달아 주고 보내는 통에, 읍내 사람들은 고장 난 게 있으면 일단 조 씨 가게부터 찾습니다. 아내와 둘이 가게를 지키고, 아들과 딸은 도시로 나가 각자 가정을 꾸렸습니다.
스물일곱 살에 가게를 얻을 때 보증금이 모자라 형님이 200만 원을 보태 준 일이 있습니다. 조 씨는 그 돈을 3년 만에 다 갚았습니다. 형님이 한사코 안 받겠다고 하자, 조 씨는 형수 손에 봉투를 쥐여 주며 말했습니다. “형님 덕에 시작했으니 갚는 것도 제 도리입니다.”
형님은 10년 전 간암으로 먼저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병실을 찾았을 때 형님은 조 씨 손을 잡고 “큰집 좀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조 씨는 해마다 형님 산소 벌초를 도맡았고, 제사 때면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장을 봐서 큰집으로 갔습니다. 큰집 보일러가 멈추면 한겨울 밤에도 공구 가방을 들고 달려갔습니다.
큰조카는 형님의 맏아들이자 종손이었습니다. 대학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못 내 휴학하려던 큰조카에게 조 씨는 가게 금고에서 300만 원을 꺼내 주었습니다. “작은아버지, 취직하면 꼭 갚을게요.” “갚긴 뭘 갚아. 졸업장이나 가져와라.”
큰조카 결혼식 날에는 아버지 없는 혼주석 곁을 지켰습니다. 사돈댁에 허리를 숙이며 “제가 이 아이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날 큰조카는 작은아버지 손을 잡고 “아버지처럼 모실게요” 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재작년 봄, 큰조카가 철물점을 찾아왔습니다. 신혼집 전세를 얻는데 대출 1억 원에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작은아버지, 이자는 한 번도 안 밀리고 낼게요. 이름만 올려 주시면 돼요.”
그날 밤 아내는 걱정했습니다. “보증은 부모 자식 간에도 서는 게 아니라던데요. 우리 노후 적금이 걸린 일이에요.” 그 적금은 조 씨가 20년 동안 가게 수입에서 다달이 떼어 부어 온 돈이었습니다. 조 씨는 한참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형님 자식이야. 형님이 살아 있었으면 형님이 섰을 거야.” 다음 날 조 씨는 은행에 가서 보증 서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처음 몇 달은 큰조카가 이따금 안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러다 전화는 차츰 뜸해졌고, 작년 추석에는 회사 일이 바쁘다며 큰집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늦가을에는 은행에서 우편물이 한 통 왔습니다. 조 씨가 전화를 걸자 큰조카는 웃었습니다. “보증인한테 원래 다 가는 안내문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조 씨는 그 말을 믿고 봉투를 서랍에 넣었습니다.
올해 설날 아침, 밤새 내린 눈이 마당에 발목까지 쌓였습니다. 조 씨는 양복을 꺼내 입었고, 아내는 전날 부친 녹두전을 찬합에 담았습니다. 대문을 나서던 조 씨는 우편함에 꽂힌 누런 봉투 두 장을 발견했습니다. 연휴 전날 들어온 모양이었습니다.
첫 번째 봉투는 은행에서 보낸 대위변제 청구서였습니다. 큰조카가 이자를 일곱 달째 연체해 대출의 기한이익이 상실되었으니, 보증인이 남은 원리금 1억여 원을 대신 갚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기한 안에 갚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거쳐 예금을 압류할 수 있다는 예고 통지서였습니다. 조 씨는 눈 덮인 대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큰집까지는 차로 30분이었습니다. 조 씨는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고, 큰조카 얼굴을 보면 사정부터 들어 보자고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큰집 마루에는 차례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형수가 앞치마를 두른 채 반갑게 맞았지만, 큰조카 내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형수님, 애들은 아직 안 왔습니까?” 형수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애들은 처가 식구들이랑 해외 리조트에서 설 쇤대요. 이것 좀 보세요, 바다 색깔이 어쩜 이래요.”
화면 속 큰조카는 야자수 아래 수영장 가에서 장인과 잔을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조 씨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형수님, 그 애가 은행 이자를 반년 넘게 안 냈답니다. 오늘 아침에 보증 선 돈을 갚으라는 통지가 왔습니다.”
형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사진을 넘기던 손끝에 가족 단톡방이 열렸습니다. 작은조카가 “형, 집에 은행 우편 와 있던데?” 하고 물은 글 아래 큰조카의 답이 남아 있었습니다. “작은아버지가 보증인이니 알아서 막겠지. 원래 우리 아버지 덕에 철물점 차린 사람이잖아.”
형수는 “아이고, 이 철없는 놈이…” 하며 주저앉았습니다. 조 씨는 형님 지방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한 뒤, 음복도 하지 않고 신발을 신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 씨는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그 200만 원은 3년 만에 다 갚았어. 그 뒤 40년은 빚이 아니라 정이었는데, 그 애는 그걸 빚으로 알았던 게야.”
연휴가 끝나자 조 씨는 20년 부은 노후 적금을 깨서 남은 빚을 모두 갚았습니다. 그리고 읍내 법무사 한 씨를 찾아갔습니다. “보증인이 빚을 대신 갚으면 그만큼 돌려 달라고 청구할 권리가 생깁니다. 구상금 청구라고 하지요.” 조 씨는 그 자리에서 소송을 내기로 했습니다.
소장이 전해지자 큰조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작은아버지, 집안끼리 소송이 말이 돼요?” 조 씨는 담담하게 답했습니다. “집안이라서 이러는 거다. 남의 돈 무서운 줄 알아야 사람 노릇을 한다.” 그 뒤로 조 씨는 명절에 큰집을 찾지 않았습니다.
보증은 정으로 서 주지만 서류 위에서는 엄연한 빚입니다. 서 주는 사람은 제 노후를 함께 거는 것이고, 부탁하는 사람은 그 이름 하나에 한 사람의 평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족이라서 더 분명히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보증을 서셨다면 은행에서 온 우편물은 누구 말만 믿지 말고 꼭 직접 열어 보세요. 정을 지키는 길은 때로 선을 긋는 데서 시작됩니다.
올 추석 다음 날 새벽, 조 씨는 혼자 형님 산소를 찾았습니다. 억새가 하얗게 핀 산비탈을 천천히 올라 봉분 앞 마른 풀을 손으로 걷어 내고 소주 한 잔을 따랐습니다. 산을 내려오는 길, 단풍 든 참나무 사이로 아침 햇살이 길게 내려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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