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 요양원비 120만원씩 대줬는데..” 장모 장례식장에서 드러난 처남들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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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모시는 일은 자식들 사이에서 가장 말이 많은 일입니다. 누가 더 자주 찾아갔는지, 누가 돈을 더 냈는지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보다 떠나신 뒤에 더 크게 불거지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시끄러워질 것을 알기에 아무 말 없이 혼자 짐을 지기도 합니다.
강 씨는 올해 일흔셋입니다. 경상도 내륙의 한 소도시에서 서른다섯 해 동안 우체국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집배원으로 시작해 창구를 거쳐 우편 업무를 맡다가 정년을 맞았습니다. 아내와는 결혼한 지 마흔여섯 해가 되었고, 아들과 딸은 모두 출가해 대처에서 살고 있습니다.
강 씨에게 장모는 어려운 어른이 아니었습니다. 신혼 시절, 단칸방에 살던 사위가 감기로 앓아눕자 장모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와서 배숙을 달여 놓고 갔습니다. “우체국 일은 비가 와도 쉬는 날이 없다더라. 몸이 밑천이다.” 그 말을 하며 사위 이마를 짚던 손을 강 씨는 오래 기억했습니다.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석 달 동안 와서 산후조리를 해 주었고, 강 씨가 승진 시험에 떨어진 해에는 말없이 찹쌀떡 한 상자를 보내왔습니다. 쪽지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다음엔 붙는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장모에게는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큰처남과 작은처남은 대도시에서 장사를 했고, 막내딸인 아내만 친정 가까이에 살았습니다. 장모는 늘 “아들은 멀고 딸은 가깝다”고 웃었습니다.
10년 전, 장모가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장기요양등급을 받아 시내 요양원에 모시기로 하던 날, 처남들이 가족 모임에서 말했습니다. “요양원비는 아들인 우리가 낸다. 누나는 시집갔으니 들여다보기만 해라.” 아내는 그 말에 눈시울을 붉히며 동생들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입소 서류는 가까이 사는 강 씨가 챙겼습니다. 그래서 요양원 연락처에 강 씨의 번호가 보호자로 함께 올라갔습니다. 석 달 뒤,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윤 원장이었습니다. “사위분, 죄송한데 석 달째 비용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강 씨는 처남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큰처남은 “요즘 가게가 어려워서요, 매형” 하고 말끝을 흐렸고, 작은처남은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강 씨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내에게 말하면 남매 사이가 깨질 것이 뻔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내는 동생들이 어머니를 모신다고 믿으며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강 씨는 다음 날 요양원에 찾아가 밀린 돈을 내고 원장에게 부탁했습니다. “앞으로 매달 제가 내겠습니다. 다만 집사람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한 달 120만 원은 연금으로 사는 집에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강 씨는 퇴직 때 받은 돈 일부를 따로 떼어 통장을 만들었고, 동네 우편취급국에서 오전 소포 접수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아내에게는 “집에 있으면 몸이 굳어서”라고 둘러댔습니다. 그 월급은 고스란히 요양원으로 갔습니다.
강 씨는 매달 25일이면 직접 요양원에 가서 돈을 냈습니다. 계좌로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장모 얼굴을 보고 싶었습니다. 장모는 사위를 알아보지 못하는 날이 많았지만, 손을 잡으면 꼭 쥐고 놓지 않았습니다.
해가 갈수록 아내의 서운함도 쌓였습니다. 처남들은 명절에도 잘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돈 대느라 바빠서 그렇겠지” 하며 동생들 편을 들었습니다. 강 씨는 그때마다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늦가을, 장모가 아흔둘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례식장에는 아침부터 찬비가 내렸습니다. 둘째 날 저녁, 조문객이 뜸해지자 처남들이 부의함 앞에 앉아 봉투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큰처남이 장부를 덮으며 말했습니다. “누나, 솔직히 말할게. 엄마 요양원비 10년을 우리가 다 댔잖아. 부의금이랑 시골 집 판 돈은 우리 둘이 나누는 게 맞지.” 작은처남이 거들었습니다. “그게 1억이 넘어. 누나는 가까이 살면서 얼굴만 비쳤고.”
아내는 상복 소매를 쥔 채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래, 너희가 고생했지.” 그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강 씨는 국그릇을 내려놓고 처남들을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빈소 입구에서 검은 우산을 접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양원 윤 원장이었습니다. 원장은 영정 앞에 절을 올린 뒤, 곧장 강 씨에게 다가와 두 손을 잡았습니다.
“사위분, 그동안 정말 애쓰셨습니다. 10년 동안 한 번도 안 밀리셨죠. 매달 25일이면 어르신이 창가에 앉아 기다리셨어요. 말씀은 못 하셔도 그날은 꼭 머리를 빗겨 달라고 하셨습니다.”
빈소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아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원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요양원비는 우리 동생들이….” 원장은 잠시 처남들 쪽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처음 석 달 밀린 뒤로는 줄곧 사위분이 내셨습니다. 아드님들 쪽에서는 따로 들어온 게 없었습니다.”
큰처남의 얼굴이 하얘졌고, 작은처남은 슬그머니 장부를 내려놓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 우편취급국 나간다던 게… 그 돈이었어요?” 강 씨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한참 뒤에야 강 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자식 노릇 따지자고 한 일 아니다. 장모님한테 받은 게 많아서 갚은 것뿐이다. 오늘은 어머니 보내 드리는 날이니 얼굴 붉히지 말자.”
큰처남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매형, 누나, 면목이 없습니다. 처음엔 곧 내려니 했는데, 매형이 내고 계시니까 그냥 모른 척했습니다.” 작은처남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발인을 마친 뒤, 아내는 동생들 앞에서 처음으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시골 집 판 돈은 셋이 똑같이 나누자. 대신 내 몫은 어머니 계시던 요양원에 기부하겠다. 그게 그이가 10년 지킨 자리니까.” 처남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 밤, 아내는 남편의 손을 오래 쓰다듬었습니다. “혼자 얼마나 무거웠어요. 왜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 했어요.” 강 씨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동생들 자랑할 때 얼굴이 참 좋았거든.”
가족 사이의 돈은 말이 앞서는 사람보다 묵묵히 내는 사람에게서 진실이 드러납니다. 큰소리로 생색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 뒤에서 조용히 빈자리를 메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를 모시는 비용은 형제들이 처음부터 함께 정하고, 누가 얼마를 냈는지 서로 볼 수 있게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부모를 보내는 날, 슬픔 대신 다툼이 남지 않습니다.
첫눈이 오기 전, 강 씨 부부는 장모가 묻힌 고향 뒷산에 올랐습니다. 산자락의 감나무에는 까치밥 몇 개가 붉게 매달려 있었고, 들판 너머로 낮은 해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봉분 앞에 나란히 앉아 해가 질 때까지 고향 마을을 내려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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