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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빚 3000만원 몰래 갚아줬는데..” 2년 뒤 침대에서 떨어진 통장 한 권에 결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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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오래 살다 보면 상대의 자존심까지 내 살림처럼 챙기게 됩니다. 남편이 실수를 해도 따져 묻기보다 조용히 뒷수습하는 쪽을 택하는 아내가 많습니다. 그렇게 지켜 준 침묵이 언젠가 같은 무게로 돌아오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황 씨는 올해 쉰아홉입니다. 서울 변두리 동네 시장 입구 백반집 주방에서 25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나가 쌀을 씻고, 하루에 김치찌개만 백 그릇 넘게 끓입니다. 예순둘인 남편은 부품 공장에서 32년을 일하다 4년 전 퇴직했습니다. 큰딸은 3년 전 결혼해 분가했고, 서른한 살 아들은 내년 봄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황 씨에게는 남편도 모르는 돈이 있었습니다. 안방 침대 매트리스 커버 속에 지퍼백으로 넣어 둔 비상금이었습니다. 시작은 아들이 세 살 때 폐렴으로 입원했던 해였습니다. 병원비 앞에서 쩔쩔매던 남편 얼굴을 본 뒤로, 황 씨는 매달 주방 일당에서 몇만 원씩 떼어 커버 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남편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황 씨는 남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손목이 시큰거려 국자를 들지 못하던 겨울, 남편은 퇴근길에 파스 한 봉지를 사 와 말없이 식탁에 올려 두었습니다. 큰딸 결혼식 날에는 혼주석에서 황 씨 손을 슬며시 잡았다가 놓았습니다. 황 씨는 그런 작은 순간들로 35년을 버텼습니다.

일이 터진 건 2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우편함에 남편 이름으로 된 은행 상환 안내문이 꽂혀 있었습니다. 대출 원금 3000만 원, 연체 예정 안내였습니다. 황 씨는 우편함 앞에 선 채 그 종이를 두 번 읽었습니다.

그날 밤 황 씨는 넌지시 물었습니다. “여보, 요새 무슨 걱정 있어요?” 남편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걱정은 무슨. 퇴직하고 노는 사람이 무슨 걱정이 있어.”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옛 직장 동료 말을 듣고 퇴직금을 주식에 넣었다가 거의 다 잃었고, 그 구멍을 메우려 몰래 대출까지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황 씨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평생 가장이라는 이름 하나로 버틴 사람이 아내 앞에서 빈손을 들키는 게 얼마나 아플지 짐작이 갔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황 씨는 매트리스 커버를 열었습니다. 25년 동안 모은 돈은 꼭 3000만 원이었습니다. 황 씨는 그 돈을 들고 은행 창구로 가서 남편의 대출을 모두 갚았습니다.

며칠 뒤 남편의 휴대전화에 대출 상환 완료 문자가 왔습니다. 남편은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다 황 씨를 힐끗 보았습니다. “당신이… 했어?” 황 씨는 설거지를 하며 대답했습니다. “몰라요. 은행이 알아서 했나 보지.” 남편은 더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은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 뒤 2년 동안 황 씨는 텅 빈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이 나이에 다시 모으기엔 늦었다는 생각에 가끔 허전했지만, 남편이 동네 산악회에 나가 웃는 얼굴을 보면 잘했다 싶었습니다. 다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지나간 것이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었습니다.

올가을 결혼 35주년을 맞아 큰딸이 침대를 바꿔 드리겠다고 나섰습니다. “엄마, 그 매트리스 스프링 다 꺼졌잖아. 이번엔 좋은 걸로 해.” 배송 날은 아침부터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남편은 산악회 모임에 나가고 없었습니다.

황 씨는 기사들이 오기 전에 방을 비우려고 남편 쪽 협탁을 끌어냈습니다. 서랍을 빼내는 순간 무언가 툭 하고 장판 위로 떨어졌습니다. 서랍 뒤판에 갈색 테이프로 붙여 두었던 비닐봉지였습니다. 오래된 테이프가 힘없이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봉지 안에는 남편 이름의 통장 한 권과 접힌 서류가 들어 있었습니다. 통장 마지막 줄의 잔액은 1억 원이 조금 넘었습니다. 입금 기록은 15년 전부터 띄엄띄엄 이어졌고, 2년 전 여름에도 돈은 한 푼도 빠져나가지 않았습니다. 황 씨가 매트리스를 털던 바로 그때도 이 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서류는 남쪽 바닷가 소도시의 원룸 가계약서였습니다. 계약자는 남편 혼자였고, 입주 날짜 칸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남편 글씨로 쓴 쪽지 한 장이 끼워져 있었습니다. ‘애들 결혼 끝나면 정리.’

황 씨는 장판 위에 주저앉았습니다. 창밖 빗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곧 초인종이 울리고 기사들이 새 침대를 들여왔지만, 황 씨에게는 그들이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녁 무렵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황 씨는 새 침대 위에 통장과 계약서를 나란히 올려 두었습니다.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그거… 어디서 났어?”

“서랍 뒤에서 떨어졌어요. 여보, 하나만 물을게요. 2년 전에도 이 돈 있었잖아요. 그때 왜 가만히 있었어요?”

남편은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건 내 노후 돈이야. 당신이 알아서 갚은 걸 나더러 어쩌라고.” 황 씨는 쪽지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럼 이건요. 애들 결혼 끝나면 정리한다는 게 나를 정리한다는 거예요?” 남편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황 씨는 울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당신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당신 체면 지켜 주려고 25년 모은 걸 털었네요. 내일 그 3000만 원 내 통장으로 보내요. 그리고 오늘부터 이 침대는 나 혼자 써요.” 그날 밤 남편은 아들 방으로 베개를 들고 건너갔습니다.

다음 날 오전, 남편은 말없이 3000만 원을 보냈습니다. 황 씨는 입금을 확인한 뒤 백반집 사장 오 씨에게 전화해 하루 쉬겠다고 했습니다. “황 씨, 무슨 일 있어요?” 황 씨는 짧게 웃었습니다. “일이 있어서, 이제 일 없게 하려고요.”

황 씨는 그 길로 지자체에서 여는 무료 법률 상담을 예약했습니다. 아들 결혼식까지는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남편이 정해 둔 날짜가 아니라 자신이 정한 날짜에 이야기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상담에서 들은 재산 분할과 절차는 수첩에 꼼꼼히 적어 두었습니다. 25년 동안 남의 체면을 셈하던 수첩에 처음으로 자기 몫을 적었습니다.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려 몰래 빚을 얻고, 몇 해 동안 조금씩 갚아 나갑니다. 그러나 비밀이 드러났을 때 남편이 먼저 걱정한 것은 아내가 아니라 자기 체면이었습니다. 노라는 그날 밤 스스로 문을 열고 집을 나섭니다.

부부 사이의 침묵은 배려가 되기도 하지만, 한쪽만 지키는 침묵은 끝내 한 사람을 지워 버립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내 몫의 돈과 내 몫의 말은 스스로 챙겨야 합니다. 누군가를 지켜 주기 전에, 나를 지켜 줄 사람도 나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지난 주말 황 씨는 큰딸과 함께 동네 뒷산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상수리나무 잎이 누렇게 물들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고, 산 아래 시장 골목에는 저녁 불빛이 하나둘 켜졌습니다. 황 씨는 새로 만든 자기 이름의 통장을 주머니에 넣은 채, 해가 질 때까지 천천히 그 길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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