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치부터 찌개, 볶음, 무침까지 고춧가루는 한국 요리에서 빠지기 어려운 재료다. 문제는 건조식품이라고 방심해 습하고 따뜻한 곳에 오래 보관했을 때다. 일부 곰팡이는 고춧가루 같은 향신료에서 증식하면서 아플라톡신이나 오크라톡신A 같은 곰팡이독소를 만들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물질은 일반적인 조리 과정에서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곰팡이가 의심되는 고춧가루는 ‘찌개에 넣어 끓이면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고춧가루에 생기는 곰팡이… 아스페르길루스가 특히 중요하다
고춧가루는 수분이 적어 미생물이 쉽게 번식하지 못할 것 같지만 보관 과정에서 습기를 흡수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따뜻하고 습한 환경은 곰팡이가 증식하고 곰팡이독소를 만들어내기 좋은 조건이 된다. 실제 국내에서 유통된 고춧가루 30개 제품을 조사한 연구에서는 아스페르길루스(Aspergillus) 속 곰팡이의 발생 비율이 높았으며 이외에도 파에실로마이세스, 리조푸스, 페니실리움, 클라도스포리움, 알터나리아 등 다양한 곰팡이가 분리됐다. 아스페르길루스 중에서는 A. ruber, A. niger를 비롯해 A. ochraceus, A. flavus 등도 확인됐다.
특히 A. flavus 가운데 일부 분리주는 실제 실험에서 아플라톡신을 생성하는 능력이 확인됐다. 같은 조사에서는 일부 고춧가루에서 오크라톡신A도 검출됐다. 모든 고춧가루에 이런 곰팡이나 독소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고춧가루가 보관과 유통 조건에 따라 곰팡이 오염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고추를 포함한 향신료를 아플라톡신 생성 곰팡이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식품군으로 명시하고 있다.

아플라톡신… 장기간 노출되면 특히 ‘간’에 문제가 된다
곰팡이가 핀 고춧가루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곰팡이 자체보다 곰팡이가 만들어 놓았을 가능성이 있는 독성 대사산물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플라톡신이다. WHO에 따르면 아플라톡신은 주로 Aspergillus flavus와 Aspergillus parasiticus 같은 곰팡이가 만들어내며 곡류와 견과류뿐 아니라 고추, 후추, 고수, 강황, 생강 같은 향신료도 오염될 수 있다. 특히 아플라톡신은 간독성이 중요한 독소다. 많은 양에 급성으로 노출되면 심각한 간 손상을 일으키는 아플라톡신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장기간의 노출은 더 주의해야 한다.
아플라톡신은 유전독성을 가지고 있어 DNA를 손상시킬 수 있으며 사람의 간암 발생과 관련된 발암성도 확인돼 있다. 국제암연구소(IARC) 역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아플라톡신 혼합물을 사람에게 발암성이 있는 물질로 평가해 왔다. 결국 고춧가루에 곰팡이가 보였는데도 ‘조금만 걷어내고 먹자’고 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곰팡이독소다.

오크라톡신A… 이번에는 ‘신장 독성’을 살펴야 한다
고춧가루에서 함께 살펴야 할 또 하나의 곰팡이독소가 오크라톡신A(ochratoxin A)다. 이 독소는 여러 종류의 아스페르길루스와 페니실리움 곰팡이가 만들어낼 수 있으며 특히 식품을 보관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 WHO는 곡류와 커피, 건조 포도, 향신료 등을 오크라톡신A가 오염될 수 있는 식품으로 설명한다. 오크라톡신A의 독성에서 특히 주목되는 장기는 신장이다. WHO와 FAO의 합동 식품첨가물전문가위원회(JECFA) 평가에서도 신장 기능 저하가 오크라톡신A의 중요한 독성 영향으로 다뤄져 왔다. 동물 연구에서는 신장 독성이 명확하게 확인됐으며 면역계와 발달 과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연구됐다.
실제 국내 고춧가루 조사에서도 30개 시료 가운데 3개에서 1.03~2.08㎍/kg의 오크라톡신A가 검출된 바 있다. 다만 이 연구에서 조사된 제품의 아플라톡신과 시트리닌은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따라서 고춧가루의 곰팡이 문제를 단순히 배탈 정도로 생각하기보다 곰팡이 종류에 따라 간과 신장을 비롯한 여러 장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독소가 생성될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찌개에 팔팔 끓이면 괜찮다?… 곰팡이독소는 일반 조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곰팡이가 조금 생긴 고춧가루를 발견했을 때 흔히 떠올리는 방법이 있다. “어차피 김치찌개에 넣고 팔팔 끓일 건데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곰팡이와 곰팡이가 이미 만들어 놓은 독소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충분한 가열은 살아 있는 많은 미생물을 죽이는 데 효과가 있지만 이미 식품 속에 생성된 화학적 독소까지 모두 없애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WHO는 대부분의 곰팡이독소가 화학적으로 안정적이며 식품 가공 과정을 견딜 수 있다고 설명한다.
WHO의 식품 위해 자료에서도 대부분의 곰팡이독소는 식품 제조와 조리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열과 가공에 비교적 안정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곰팡이가 생긴 고춧가루를 찌개에 넣고 오래 끓이거나 볶음팬에서 가열했다고 해서 아플라톡신이나 오크라톡신A가 안전한 수준으로 모두 사라졌다고 볼 수 없다. 겉에 보이는 곰팡이 부분만 숟가락으로 걷어내는 방법 역시 권하기 어렵다. WHO는 독소를 생성하는 곰팡이가 식품의 표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까지 침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곰팡이가 확실하게 확인됐다면 가열해서 살리는 것이 아니라 폐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세균도 생길까… 고춧가루의 핵심 위험은 ‘곰팡이독소’와 구분해서 봐야 한다
고춧가루는 향신료이기 때문에 생산과 건조, 분쇄, 유통 과정에서 세균이나 곰팡이 등 다양한 미생물에 오염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구분할 것이 있다. 아플라톡신과 오크라톡신A는 세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곰팡이가 생성하는 독소라는 점이다. 곰팡이가 핀 고춧가루의 장기적인 건강 위험을 설명할 때 핵심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도 이 곰팡이독소다.
세균의 경우에도 식품 원료의 위생과 가공 환경에 따라 오염 가능성이 달라지므로 고춧가루를 무균 식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춧가루에 눈에 보이는 곰팡이가 생긴 상황에서 “어떤 세균이 생겼는지”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흰색이나 녹색, 검은색 반점이 없다고 해서 곰팡이독소가 반드시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WHO가 곰팡이독소 관리에서 강조하는 것도 문제가 생긴 뒤 가열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충분히 건조하고 습기와 높은 온도를 피하며 적절하게 보관해 곰팡이 증식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고춧가루는 ‘습기’부터 막아야 한다… 눅눅해지기 전에 보관법을 바꾸자
고춧가루를 안전하게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곰팡이가 생긴 뒤 처리법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곰팡이가 자랄 조건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WHO는 곰팡이가 따뜻하고 습한 환경에서 잘 증식하며 식품을 충분히 건조한 상태로 유지하고 너무 따뜻하지 않은 곳에서 보관하는 것이 곰팡이와 곰팡이독소 발생을 줄이는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가정에서는 고춧가루를 사용할 때 젖은 숟가락을 넣지 않고 사용 후 바로 밀폐해 외부 습기가 들어가는 것을 줄이는 것이 좋다.
많은 양을 한 통에 담아 계속 열고 닫기보다 소분해서 보관하면 공기와 습기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도 줄일 수 있다. 특히 색이나 냄새가 평소와 확연히 달라졌거나 눅눅하게 뭉치면서 곰팡이가 확인된다면 아깝더라도 버리는 편이 낫다. WHO 역시 곰팡이가 보이거나 변색된 식품은 폐기하도록 권고한다. 고춧가루는 음식에 한 번에 들어가는 양이 많지 않아 보이지만 김치와 찌개, 볶음 등 한국 식탁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재료다. 오래 두고 먹는 식재료일수록 ‘잘 끓여 먹는 것’보다 처음부터 건조하고 깨끗하게 보관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한눈에 보는 핵심 정리
아스페르길루스는 고춧가루에서도 확인되는 주요 곰팡이군이며 일부 종은 아플라톡신이나 오크라톡신A 같은 독소를 만들 수 있다.
아플라톡신은 특히 간독성과 유전독성이 중요하며 장기적인 노출은 간암 위험과 관련된다.
오크라톡신A는 신장 독성이 중요한 곰팡이독소로, 향신료에서도 오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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