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며느리 학원비 500만원 대줬는데..” 5년 뒤 며느리가 내민 자격증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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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에서 시집온 며느리를 처음 맞을 때 시어머니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먹는 음식도 다르니, 한집안 식구가 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섭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손을 내미는 순간, 낯선 며느리는 누구보다 든든한 딸이 되기도 합니다.
경북 상주에 사는 권순자 씨는 올해 예순여덟입니다. 남편과 함께 40년 동안 상주 외곽에서 곶감과 배 농사를 지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마당 가득 감을 깎아 처마 밑에 매달던 손으로 두 아들을 키워 냈습니다.
큰아들 성호는 도시로 나갔다가 10여 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마흔이 다 되어 베트남에서 온 스물여섯 살 며느리 화를 맞았습니다. 순자 씨는 아들이 장가를 간다는 기쁨보다 먼 나라 며느리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걱정이 더 컸습니다.

처음 몇 해는 서로 답답한 날이 많았습니다. 순자 씨가 “솥에 물 좀 앉혀라” 하면 화는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된장국을 끓이라고 하면 낯선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고, 순자 씨는 그런 며느리가 야속해 괜히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나무랐습니다. “말이 안 통하면 몸으로 가르치면 되지.” 그해 가을 남편은 화를 마당에 앉혀 놓고 감 깎는 법부터 차근차근 보여 주었습니다. 화는 서툰 손으로 감을 깎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지만, 끝까지 칼을 놓지 않았습니다.
화는 밤이면 방에서 혼자 울었습니다. 순자 씨는 그 울음소리를 듣고도 모른 척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 부엌에 나가 보니 화가 휴대전화로 한국어 동영상을 틀어 놓고 서툰 발음으로 “어머님, 진지 드세요”를 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자 씨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낯선 땅에서 혼자 버티는 며느리가 수십 년 전 시집오던 해의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순자 씨도 열아홉에 산골로 시집와 시어머니 앞에서 밤마다 숨죽여 울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순자 씨도 손주에게 베트남 말을 몇 마디 배웠습니다. 아침이면 며느리에게 서툰 발음으로 “씬 짜오” 하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화는 처음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얼굴이 환해지며 시어머니를 꼭 안았습니다.

5년 전 봄, 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어머님, 저 한국어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읍내에 학원이 있어요.” 그러나 아들 성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농사철에 학원은 무슨 학원이야. 애들도 봐야 하는데.”
그날 밤 순자 씨는 장롱 깊숙이 넣어 둔 곶감 판 돈 봉투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며느리의 손에 쥐여 주었습니다. “아범 말은 신경 쓰지 말고 다녀라. 학원비하고 운전 학원비까지 다 들었다. 손주들은 내가 볼 테니.”
봉투에는 500만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화는 봉투를 받아 들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순자 씨는 며느리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습니다. “울지 마라. 너도 이제 우리 집 딸이다. 딸이 공부하겠다는데 엄마가 대 주는 게 당연하지.”

그날부터 화는 낮에는 밭일을 하고 저녁이면 읍내 학원에 다녔습니다. 순자 씨는 저녁마다 손주 둘에게 밥을 먹이고 숙제를 봐 주었습니다. 아들은 처음에 툴툴거렸지만, 밤늦게까지 공책을 펴 놓고 공부하는 아내를 보며 점점 말이 줄었습니다.
첫 한국어 시험에서 화는 떨어졌습니다. 시험지를 쥐고 고개를 숙인 며느리에게 순자 씨가 말했습니다. “나는 한글도 마흔 넘어 마을 한글 교실에서 겨우 뗐다. 한 번에 붙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화는 그 말에 다시 책을 폈고, 석 달 뒤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화는 운전면허도 한 번에 붙었습니다. 그 뒤로는 순자 씨를 태우고 읍내 병원과 장에 다녔습니다. 순자 씨가 무릎이 아파 걷기 힘들어하면 차를 대문 앞까지 대 놓고 기다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권 씨네 며느리가 친딸보다 낫다”며 부러워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화가 베트남 친정어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다가 순자 씨를 불렀습니다. 화면 속 사돈은 순자 씨를 보자마자 두 손을 모으고 연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화가 통역해 주었습니다. “우리 딸을 친딸처럼 아껴 주셔서 고맙대요.” 순자 씨도 화면을 향해 서툴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사이 화의 한국어 실력은 몰라보게 늘었습니다. 손주들 학교 알림장도 척척 읽었고, 동네 어르신들 휴대전화 문자도 대신 읽어 드렸습니다. 순자 씨는 그런 며느리가 대견해 시장에 갈 때마다 며느리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몇 해 전에는 화가 마을회관에서 동네 할머니들에게 베트남 쌀국수 끓이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할머니들도 한 그릇씩 비우고 나서는 “고향 음식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며 엄지를 치켜세웠습니다.

그사이 화는 읍내 보건소에서 통역 봉사도 시작했습니다. 한국말이 서툰 다른 나라 며느리들이 아이를 데리고 예방접종을 받으러 오면, 화가 옆에서 의사의 말을 하나하나 풀어 주었습니다. 보건소 간호사들은 “화 씨가 없으면 일이 안 된다”며 고마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화가 밭일을 마치고 돌아와 순자 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손에는 하얀 봉투와 서류철 하나가 들려 있었습니다. “어머님, 드릴 게 있어요.”
서류철 안에는 자격증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중언어 강사 자격증이었습니다. 화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다음 달부터 상주 초등학교에서 다문화 아이들 가르쳐요. 저처럼 말이 안 통해서 우는 아이들한테 한국어랑 베트남어를 같이 가르쳐요.”

순자 씨는 자격증을 받아 든 손이 떨렸습니다. 화는 하얀 봉투를 내밀며 말을 이었습니다. “이건 첫 월급 미리 받은 거예요. 5년 전에 어머님이 주신 학원비가 없었으면 저는 지금도 밤마다 울고 있었을 거예요.”
화는 순자 씨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어머님이 저한테 ‘너도 우리 집 딸이다’ 하셨잖아요. 그 말 듣고 처음으로 여기가 제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제가 어머님 딸 노릇 할게요.”
화는 봉투를 받지 않으려는 순자 씨 손에 억지로 쥐여 주며 덧붙였습니다. “이 돈으로 어머님 무릎 주사 맞으러 가요. 이번엔 제가 운전해서 대구 큰 병원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순자 씨는 대답 대신 며느리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습니다.
순자 씨는 며느리를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5년 전 장롱 속 곶감 판 돈 500만 원이 며느리의 꿈이 되고, 또 다른 아이들의 희망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방문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 성호도 조용히 눈가를 훔쳤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손녀가 자격증을 보고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할머니, 엄마가 우리 학교 선생님 된대요!” 순자 씨는 손녀를 품에 안고 말했습니다. “그래, 니 엄마가 우리 집안 자랑이다.”

그날 밤, 화는 순자 씨를 위해 쌀국수를 끓였습니다. 맑은 국물에 쌀국수를 말고 숙주와 고수를 듬뿍 올린 소박한 한 그릇이었습니다. 순자 씨가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더니 말했습니다. “처음엔 이 냄새가 그렇게 낯설더니, 이제는 네가 끓여 준 이게 제일 맛있다.” 화는 웃으며 순자 씨 그릇에 고기 한 점을 더 얹어 주었습니다.
김려령 작가의 소설 『완득이』는 필리핀에서 온 어머니를 둔 소년 완득이가 담임 선생님과 이웃들을 만나 세상 밖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줄 때, 낯선 사람은 비로소 우리 곁의 가족이 됩니다.

며느리든 사위든 한집안 식구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도, 먼저 마음을 열고 기회를 주는 어른이 있을 때 그 시간은 훨씬 짧아집니다. 오늘 곁에 있는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 보세요.
올가을 순자 씨는 며느리와 손주들과 함께 상주 경천섬 강변길을 걸었습니다. 낙동강 물길 위로 붉은 노을이 번졌고, 강변 억새가 바람에 은빛으로 일렁였습니다. 순자 씨는 며느리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음을 맞추었습니다.
출처 : ‘완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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