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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못 갚은 빚 500만원 갚으러 갔는데..” 그 집 아들이 내민 장부에 울었다

책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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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은 돈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갚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도, 기다려 준 사람의 마음에도 오래도록 무거운 짐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빚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깊은 우정의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충남 공주에 사는 한복례 씨는 올해 일흔하나입니다. 공주 산성시장 근처에서 40년 가까이 양장점을 하며 남편과 함께 삼 남매를 키웠습니다. 남편은 작은 철공소를 했고, 지난해 겨울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의 사십구재를 마치고 복례 씨는 남편의 유품을 정리했습니다. 철공소에서 쓰던 공구며 낡은 작업복을 하나하나 상자에 담다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손때 묻은 수첩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수첩 마지막 장에는 남편의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1998년 봄, 대전 김 사장에게 500만 원 빌림. 철공소 살리라고 차용증도 없이 빌려준 돈. 꼭 갚아야 하는데.] 그 아래에는 몇 번이고 덧쓴 듯 진하게 ‘미안하다’라는 글씨가 남아 있었습니다.

복례 씨는 그 김 사장을 기억했습니다. 남편의 군대 동기로, 대전에서 정미소와 쌀가게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IMF 외환 위기로 철공소가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을 때, 남편이 대전에 다녀와서 “친구 덕에 한숨 돌렸다”고 했던 일도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남편은 김 사장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습니다. 철공소는 겨우 버텼지만 형편은 늘 빠듯했고, 남편은 친구에게 연락할 면목이 없다며 명절 안부 전화조차 피했습니다. 복례 씨는 그저 사이가 멀어진 줄로만 알았습니다.

남편은 말년에 병상에 누워서도 가끔 창밖으로 대전 쪽 하늘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대전에 한 번 가 봐야 하는데…” 혼잣말을 하다가도 복례 씨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복례 씨는 수첩을 펼쳐 놓고 밤새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평생 마음의 짐으로 안고 간 빚이었습니다. “당신이 못 갚은 건 내가 갚아 줄게요. 그래야 당신도 편히 가지요.” 복례 씨는 양장점을 하며 모아 둔 적금을 깨서 500만 원을 봉투에 담았습니다.

김 사장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복례 씨는 남편의 군대 동기 모임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수첩에 적힌 옛 정미소 주소를 들고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정미소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쌀가게 하나가 여전히 같은 간판을 달고 있었습니다.

가게 안에서 쉰 줄의 남자가 쌀 포대를 나르고 있었습니다. 복례 씨가 김 사장을 찾는다고 하자, 남자는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제가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복례 씨는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복례 씨는 떨리는 손으로 남편의 수첩과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제 남편이 아버님께 진 빚이에요.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갚고 싶어서 왔습니다. 남편도 지난겨울에 세상을 떠났어요.” 아들은 수첩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뒤 아들은 누렇게 바랜 장부 한 권을 들고 나왔습니다. 김 사장이 정미소를 하며 평생 써 온 거래 장부였습니다. 아들은 장부의 한 쪽을 펼쳐 복례 씨 앞에 내밀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공주에서 누가 찾아오면 꼭 이걸 보여 드리라고 하셨어요.”

그 쪽에는 김 사장의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1998년 봄, 공주 한 사장 500만 원. 받지 않기로 함.] 그리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가 이어져 있었습니다. [1997년 겨울, 정미소 직원 월급날을 못 맞춰 쩔쩔맬 때 한 사장이 철공소 기계를 팔아 몰래 300만 원을 보내 줬다. 그 돈으로 직원들 설을 쇠게 했다.]

복례 씨는 장부를 읽어 내려가다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IMF 무렵 철공소 기계 한 대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남편은 “고장 나서 팔았다”고만 했습니다. 그 기계가 친구의 직원들 월급이 되었던 것입니다.

장부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나한테 빌린 돈만 기억하고, 자기가 준 돈은 잊어버린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대신 기억한다. 한 사장 빚은 없다. 우리 사이에 갚을 것은 없다.] 복례 씨는 장부를 가슴에 끌어안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아들도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어요. 한 사장이 연락을 안 하는 건 미안해서 그런 거니까, 먼저 찾아가면 오히려 마음 상한다고요. 그래서 기다리기만 하셨대요. 언젠가 그 친구가 찾아오면 꼭 쌀밥 한 그릇 지어 먹이라고 하셨어요.”

아들은 장부 맨 뒤에 끼워 둔 흑백 사진 한 장도 꺼냈습니다. 군복을 입은 두 청년이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사진 뒷면에는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평생 형제’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들은 끝내 봉투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 돈 받으면 아버지한테 혼납니다. 대신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아버님 산소가 어디인지 알려 주세요. 아버지 대신 제가 인사드리러 가고 싶습니다.” 복례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 주말, 아들은 아내와 함께 공주에 있는 남편의 산소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산소 앞에 갓 찧은 햅쌀 한 포대와 소주 한 병을 올렸습니다. “아저씨, 아버지가 이제 빚 다 받으셨다고 하실 겁니다.” 복례 씨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또 한 번 눈물을 훔쳤습니다.

복례 씨는 집으로 돌아와 남편의 수첩 마지막 장에 한 줄을 덧붙였습니다. [여보, 당신 빚은 없대요. 당신 친구가 다 기억하고 있었대요.] 그리고 수첩을 남편 사진 옆에 나란히 세워 두었습니다.

그날 밤 복례 씨는 남편 사진 앞에 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 얘기를 한 번도 안 했어요. 나한테까지 숨길 일이었어요?” 사진 속 남편은 여전히 쑥스러운 듯 웃고만 있었습니다.

그 뒤로 두 집은 명절마다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김 사장의 아들은 햅쌀이 나오면 공주로 쌀 한 포대를 부쳐 왔고, 복례 씨는 손수 지은 앞치마 두 벌을 대전으로 보냈습니다. 두 아버지가 끊어 두었던 길을 이제 자식들이 다시 잇고 있었습니다.

지난달에는 김 사장의 아들 내외가 복례 씨를 대전 쌀가게로 초대했습니다. 갓 지은 햅쌀밥에 된장찌개와 김치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이었습니다. 아들의 아내가 밥을 수북이 퍼 주며 말했습니다. “아버님 유언이에요. 꼭 배부르게 드시고 가셔야 해요.” 복례 씨는 밥 한 그릇을 남김없이 비웠습니다.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에서 이반은 계산할 줄 모르는 바보라 불리지만,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고 묵묵히 일하며 끝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서로 주고받은 것을 셈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우리는 받은 것은 오래 기억하고, 준 것은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진짜 우정은 서로의 빚을 세지 않고 서로의 마음을 기억해 주는 데서 자랍니다. 오늘 오래 연락하지 못한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미안한 마음을 접고 먼저 안부를 건네 보세요.

올가을 복례 씨는 막내딸과 함께 공산성 성곽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성곽 아래로 금강이 유유히 흘렀고, 성벽을 따라 늘어선 나무마다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복례 씨는 딸의 팔짱을 끼고 해가 질 때까지 금강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출처 : ‘바보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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